“학생 모두가 원해” vs “우린 음대 노예다”
이 공연에 참여한 교수진의 제자 70여 명 모두 약 한 달간 주말을 반납하며 협주 연습에 ‘열정 페이’를 종용당했다. 예비 국악인들은 3월 초부터 주말만 되면 교수들에게 불려 다녔다. 교수들은 쌈짓돈조차 학생에게 주지 않았다. 교수 개인의 잔칫상에 들러리로 강제 초대된 셈이다.
제자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일부 국악계 교수의 행태는 이뿐만 아니었다. 이화여대 한국음악 가야금 전공 문재숙 교수는 아예 자신의 종교 봉사단체 ‘예가회’ 행사에까지 학생을 동원해 왔다. 지난 2월 한 대형 교회에서 열린 연주회에서도 문 교수는 자신의 국악 전공 제자 일부를 불러들였다.
문재숙 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예가회를 운영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30년이 다 돼간다. 그 사이에 불려간 학생은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문 교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연주비를 챙겨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공연에 참여했던 예비 국악인들은 한목소리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예비 국악인은 “교수님이 연주회 있다고 말씀하시면 ‘왜 또…”라는 말이 가장 먼저 튀어 나온다. ‘너희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교수의 말도 이젠 지겹다. 주말 다 날아가고 연주비는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교수진은 제자들의 이런 속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자의 가슴앓이를 ‘자진 행동’이라고 했다. 정유화락 공연 교수진은 “학생 모두가 원하는 공연이었고 해보지 않은 곡도 연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반응했다. 민의식 한예종 교수는 “연주비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강제가 아니었다. 일부 대학원생과 현재 직장이 없는 졸업생 가운데 ‘원하는 사람’만 받아서 공연했다. 식사 대접도 하며 잘 마무리 지었다”며 “학생들이 연주해보지 않았던 연주곡도 공부시켜 주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마쳤다”고 밝혔다. 강영근 이화여대 교수는 “공연비를 주려면 학생이 우리 보고 계약을 하자고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생 한 번뿐인 연주회라고 대학원생과 학부 졸업생이 자진해서 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공연에 참여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일렀다.
문재숙 교수의 경우 초청한 연주인에게는 연주비를 줬지만 제자들에겐 공연비조로 자신의 음반을 돌렸다. 문 교수는 “교회 같은 곳에서는 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공연에 참여한 외부 초청 연주인에게는 자비로 돈을 줬다. 학생들에게는 1만 원 상당되는 선물을 돌렸다”고 전했다. 여기서 언급된 1만 원 상당의 선물이 바로 자신의 음반이다.
이처럼 국악계 교수진이 제자의 시간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데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국악계 특유의 관행 탓이다. 국악계의 문은 좁다. 한정된 각 지자체 연주단이나 국립국악원, 강사 자리에 목마른 학생이나 졸업생은 어떻게든 교수의 눈에 들려고 이와 같은 ‘자진 납세’를 반복한다. 그만큼 유명 교수의 입김과 추천이 ‘개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는 탓이다. 축적된 제자들의 호의가 교수들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된 것이다.
교수진의 예비 국악인 착취를 막으려면 의식의 변화가 필수다. 하지만 굳어진 관행은 쉽사리 바뀔 리 없다.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국립국악원 등 정부 산하 공연장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문체부의 후원을 받는 공연에서는 기획자와 연주자가 표준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됐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영화계는 제작사가 영화 촬영에 투입되는 모든 스태프와 일대일로 표준계약을 맺는다. 예전에는 제작사와 협력업체 대표만 맺었는데 협력업체 대표가 자신이 고용한 직원에게 열정 페이를 강요한 적이 많아 표준계약제도가 도입됐다”며 “일회성이더라도 공연에 투입되는 시간은 근로나 마찬가지다. 대가를 정확히 밝히고 열정 페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악계는 최소 공공 공연장 공연만큼은 표준계약제도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고용노동부 측도 문화예술인에게 일종의 보호장치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와 학습이 병행될 경우 표준계약을 할 수 있도록 교육부와 협의한 바 있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보호장치 역시 필요해 보인다. 문체부의 자문이 들어온다면 서로 협의해서 제대로 된 절차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체부 관계자는 “정유화락 같은 후원 공연이나 국립국악원 등 공공 공연장 공연은 일종의 심의를 거친다. 공연 계획서도 받는다. 다만 예산이나 연주자에게 할당된 연주비까지 확인하진 않는다”며 “연주비를 지급할 수 있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와 협의해서 향후에 관련 제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숙 교수는 무형문화재다. 회갑 기념 공연을 기획한 교수 3인방 역시 마찬가지다. 한 국악계 관계자는 “명예와 권위, 자리에만 급급해 정작 ‘관행’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제자인 예비 국악인을 화수분처럼 이용한다면 국가에서 공인하는 예술가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