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돌다가 ‘책상’ 뽑힐라
▲ 정동영 전 장관(왼쪽아래)과 손학규 전 대표는 어려운 정치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2선으로 후퇴하면서도 대망론의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4일 퇴임 기자회견장의 손학규 전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들 4인방은 지난해 대선과 4·9 총선을 거치면서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하게 위축돼 정치 생명마저 위협받고 있다. 손 전 대표가 7·6 전당대회를 끝으로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이들 중량급 인사들은 모두 ‘정치 2선’으로 후퇴한 상태다. 그렇다고 이들이 쉽게 정계를 은퇴할 것 같지는 않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들의 시선은 이미 차기 대권을 향하고 있을 것이란 다소 이른 분석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차기 대권을 겨냥한 이들의 정치 행보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과연 이들은 멈춰버린 대권시계를 다시 가동시킬 수 있을까.
“민주당의 차기 대권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난 2일 기자와 만난 정치평론가 A 씨가 던진 말이다. A 씨는 “과거 민주당을 이끌어왔던 정동영·김근태 전 장관, 이해찬 전 총리가 순차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데 이어 신주류 좌장이자 유력한 차기주자인 손학규 전 대표가 정치 2선 후퇴를 앞둔 지금부터 민주당의 차기 진검승부는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A 씨는 이어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대권 도전기’에 비춰볼 때 2선으로 후퇴한 이들 중량급 인사들도 분명 차기 대권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라며 “정치적 시련기를 어떻게 인내하고 극복하느냐 또 재충전 기간에 정치 지도자로서 위상을 어떻게 재정립시킬지의 여부에 따라 이들의 대권 명암은 극명하게 갈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이들 민주당 인사들이 당장은 어려운 정치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절치부심하며 ‘화려한 부활’ 내지는 차기 대권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민주당 경선 때 한 차례 격돌한 바 있는 정 전 장관과 손 전 대표는 어떻게든 차기 대권에 재도전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 전 장관은 민주당 대선후보였다는 프리미엄과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갖추고 있고 손 전 대표는 신주류 좌장으로 불모지인 민주당에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사람이 차기 대권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근본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정 전 장관과 손 전 대표는 비슷한 시기에 각각 미국 유학길(2일)에 오르고 대표 퇴임 기자회견(4일)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상징적인 행보였지만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대망론’을 꿈꾸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과 4·9 총선에서 잇따라 쓴 잔을 마신 뒤 정치적 휴지기를 갖고 있는 정 전 장관은 2일 부인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훌륭한 정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책도 보고 사람도 만나 제 나름으로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다”며 ‘대망론’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또 “미국이 왜 변화를 표방한 버락 오바마에게 열광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미 대선 전당대회에도 가볼 생각”이라며 국내외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갖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2~3년 내 한반도 주변에서 지각 변동이 올 것”이라고 언급한 대목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대북 문제와 한반도 정세에 대한 연구와 해법을 구상하겠다는 복심과 함께 강한 대권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7월 4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가진 손 전 대표도 재기에 대한 강한 의지와 대망론을 감추지 않았다. 7·6 전대를 이틀 앞둔 이날 손 전 대표는 “당 대표를 맡으며 50년 전통 야당의 생명력, 끈기가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야당의 커다란 자부심”이라고 말해 자신은 이제 당당한 야당 지도자이자 당내 주류 세력임을 부각시켰다. 그는 또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들에게 “좀 쉬면서 진정으로 과연 이 사회가 손학규를 필요로 하는지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우고 저 자신을 돌아보겠다”고 답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토대로 정치지도자로 거듭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 이해찬 전 총리(왼쪽)와 김근태 전 장관도 호시탐탐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 ||
정 전 장관은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에 치러진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두 달여 만에 복귀, 대선후보가 된 전력이 있다. 당시에는 정 전 장관을 정점으로 한 정동영계가 주류세력으로 당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지난해 대선과 4·9 총선을 거치면서 정동영계는 소수파로 전락했고 이번 7·6 전대에서도 최고위원 후보조차 못 내고 뿔뿔이 흩어져 각개전투를 치른 바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2002년 당내 경선과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선 정 전 장관의 상품가치가 한계점에 달해 더 이상 대선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란 극단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난 1월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위기에 처한 민주당 대표직을 수락한 손 전 대표의 처지 또한 녹록치가 않다. 손 전 대표는 대선 패배로 침몰 위기에 처한 민주평화 세력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고 공천혁명으로 참패가 예상됐던 4·9 총선에서 81석을 확보해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총선 공천과 지역위원장 선임 과정에서 ‘자파 챙기기’ 의혹과 맞물려 ‘나눠먹기’ 비판에 직면한 바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나 ‘쇠고기 파동’으로 파생된 국회 등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권의 논리에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정체성 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당 일각에서는 손 전 대표를 겨냥해 “차라리 한나라당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극단적인 발언이 나돌기도 했다.
이해찬 전 총리와 김근태 전 장관의 정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전 총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실세 총리’로 정치적 위상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친노 그룹 좌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전 장관 역시 진보 정권 10년 동안 재야파 수장으로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고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정 전 장관과 함께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치열한 대권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해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낙마하고 4·9 총선에서도 불출마(이해찬)와 낙선(김근태)의 고배를 마시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전 총리와 김 전 장관은 당분간 정치 휴지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두 사람 역시 정치 재개와 차기 대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 재평가를 받으면서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고 친노 그룹도 호시탐탐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미뤄 이 전 총리가 정치활동을 재개하거나 차기 대권에 재도전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게 정가의 중론이다. 김 전 장관 또한 재야파와 민주평화세력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차기 대권후보군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원외’라는 현실적 한계와 낮은 대중적 인기 등 어려운 정치 상황에 직면해 있다.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중도하차나 불출마를 선택한 전력은 정치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정치 철학과 리더십 공백이라는 악재로 작용될 소지도 다분하다.
차기 대권까지는 아직도 4년 5개월이 넘는 긴 세월이 남아 있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 DJ의 말처럼 민주당 원외 차기주자 4인방의 대권 도전기는 향후 정국 기상도 및 정치지형 변화와 맞물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언론과 국민적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 4인방의 외로운 대권 행보가 언제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지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