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냐 소멸이냐’ 당 운명에 달렸다
대선 기간 거의 매일 신문 지면과 TV 화면을 장식했던 이들의 이름과 얼굴이 선거가 끝난 후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정치에서 패자는 존재감이 없다. 국내에 기반이 빈약한 진보정당 주자로서 크게 선전했다고 평가받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달리 이들 3인의 전(前) 대선 후보는 정녕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9일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출구조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임준선 기자
# 개인플레이 홍준표, 당권 도전 산 넘어 산
홍준표 후보는 사실 이번 대선에서 선전했다. 역대 대선 사상 가장 큰 표차로 패배했다고 하지만 홍 후보 출발은 문재인 대통령과 비교하면 몇 백 미터가량 늦었다. 이번 대선은 탄핵과 연계된 박근혜 정권 심판 선거였고, 홍 후보가 개인역량으로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악재 속에 치러졌다는 특수성이 있었다. 홍 후보 득표율(24.03%)을 낮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국당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불임정당 위기에 놓여있었다. 홍 후보는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던 당이 재활할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홍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단독 드리블로 적진을 파고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홍 후보가 당의 지원사격 없이 정치적 개인기를 통해 치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대선후보를 내겠다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을 감안할 때, 홍 후보가 보수층을 결집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꺾고 득표 2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어찌 보면 드라마틱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홍준표 책임론’도 나온다. 선거 막판 홍 후보가 바른정당 탈당자 복귀를 허용하고 친박(친박근혜)계 의원 징계 해제를 결정한 것을 두고 당내에서는 홍 후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통합 행보를 어설프게 펼치면서 지지율 상승세가 주춤해졌고,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박스권을 뚫고 다시 올라가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지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도 홍 후보를 어렵게 한 대목이다. 선거 초반 “춘향인 줄 알고 뽑았는데 향단이었다”라고 하는 등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독설을 뿜다가 이후에는 “헌재의 탄핵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등 왔다 갔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패장이 된 홍 후보의 ‘미래’는 이제 야당의 위치에 선 자유한국당 당권을 쥘 수 있느냐에 달렸다. 홍 후보는 선거유세 기간 당권 도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승복연설에서는 “저는 무너진 자유한국당을 복원한 것에 만족한다”며 자신의 공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자평을 두고 일각에서는 홍 후보가 대선 결과의 ‘지분’을 강조하며 조만간 치러질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는 홍 후보가 당권을 쥐기에는 무리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가 향후 정치적 행보를 하기에는 당내 세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현역 의원들을 규합한 세몰이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내 기반이 거의 없는 홍 후보가 대구경북(TK) 등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당 내부에서 세력 규합이 쉽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도 최근 한 방송에 나와 홍 후보의 당권 도전 여부와 관련, “당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저한테도 누차 ‘이번에 만약 당선이 안 되면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대선에서 막 떨어졌는데 또 당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밝혔다.
더욱이 홍 후보는 대선이 끝난 후 미국으로 출국해 차남 부부를 만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한두 달 머물 생각인데 6, 7월 중 열릴 것으로 보이는 한국당 전당대회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잡지 못한다면 ‘홍카콜라’의 재등장은 어렵지 않느냐는 관측이 많다.
안철수 후보가 10일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당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을 마친 뒤 당직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한때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양강구도를 형성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거칠 것 없던 기세는 네거티브 공방전과 TV토론을 거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선거 막판 ‘뚜벅이 유세’로 반전을 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위를 바라봤지만 결국 3등이었다. 롤러코스터 선거를 치르며 두터운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안 후보에게는 지금 짙은 먹장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당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국민의당과의 통합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경우 호남에서 입지가 줄어든 국민의당 내부에서 원심력이 작동해 당이 깨질 수 있다.
안 후보에게 우호적이지 않던 호남 의원들 중심으로 “안철수 이제 떠나라”라는 독설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당 내부에서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안 후보가 양강구도를 형성할 당시 보수진영과의 연대 및 후보단일화에 대해 불가론을 견지한 점이 패배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호남 의원들이 많다. 정치공학적 연대에 대한 불가론을 국민과의 신뢰로 여기는 안 후보와는 입장차가 확연했던 것이다. 호남 출신 한 전직 국회의원은 “지지율이 높았을 때 바른정당 등을 안았으면 됐는데 안 후보는 다른 세력을 껴안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다.
안 후보가 정계은퇴 카드를 꺼낼 가능성은 현재로는 아주 낮다는 관측이다. 안 후보는 대선 패배를 승복하는 발언을 하면서 “변화의 열망에 부응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대한민국의 변화와 미래를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언급, 정치판을 떠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당분간은 정치판과 일정 거리를 둘 것으로 점쳐진다. 정치권에서도 지금 상황은 잠수를 타야 하는 시기라는 게 일반적 의견이다. 이에 따라 안 후보는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대선후보로 등록하면서 국회의원직을 던진 만큼, 여의도 정치권 밖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일단 해외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는 게 측근들 얘기다. 안 후보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일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82일 만에 귀국해 4·24 서울 노원병 보궐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지방선거가 안 후보의 ‘컴백’ 시기가 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비록 대권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갖가지 연대론에 흔들리지 않고 약속한 대로 후보 단일화 없이 완주한 것은 안 후보의 정치적 자산으로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안 후보는 새로운 상황 분석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안 후보를 잘 아는 한 현역 의원은 “머리가 비상하기 때문에 왜 졌는지를 잘 분석할 것이다. 결론이 나오면 두 번의 실패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9일 서울 영등포구 바른정당 당사에서 19대 대통령 선거 결과와 관련 입장을 전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 악전고투 유승민, 바른정당 지켜낼까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악전고투했다. 전국적 지명도를 획득한 대구경북(TK) 정치인이 갈수록 줄어드는데 그는 전국무대라는 대권에 도전, 선거 초반 혹독한 지지율 저조 속에서도 뚜벅뚜벅 인지도를 높여 6.76%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유 후보는 선거 내내 지지율 부진과 단일화 압박 등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완주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소신 있는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대선주자 TV토론에서는 ‘가장 잘한 후보’라는 평도 들었다. 국회 국방위원장 경력을 쌓으며 공부한 안보 분야,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경제적 식견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선거 막판 불거진 동료 의원들의 ‘역탈당’ 사태로 후원금과 지지선언이 쇄도하는 효과도 있었다.
바른정당 내에서도 유 후보의 선전을 인정하고 있다. 기대에 비해 아쉬움은 남지만, 희망의 빛을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 후보는 10일 선대위 해단식 후 “국민께서 이제 조금씩 알아주시기 시작했다. ‘저런 새로운 보수당이라면 지지해도 좋겠다’라는 확신이 가질 수 있도록 그날이 올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선 재도전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유 후보도 안철수 후보와 비슷한 숙제를 안고 있다. 바른정당이 제대로 안착될지가 불투명한 것이다. 바른정당이 한국당과의 흡수 절차에 들어가면서 유 후보 본인과 측근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누가 봐도 유 후보 앞에 가시밭길이 놓여있다. 바른정당이 20석으로 겨우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소수 정당으로서의 존립 가능성에 의문을 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 명이라도 더 이탈하면 원내교섭단체 지위조차 붕괴할 처지다. 원내교섭단체가 무너지면 바른정당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하며 집권여당이 됐지만 ‘여소야대’ 상황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계개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바른정당도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바른정당 관계자들도 여권발 정계개편 추이를 본 뒤 야권도 정계개편의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정계개편은 유 후보에게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바른정당의 입지를 지켜내는 수완을 발휘, 새로운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반면,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최악의 경우 바른정당이 한국당에 흡수 통합되면 여태 쌓아온 명성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유 후보가 TK에서 인기를 많이 잃고 오히려 수도권 등에서 인지도가 올라간 만큼 차기를 노린다면 정치적 터전인 대구를 벗어나 수도권으로 지역구를 이동, 새로운 세력 규합에 나서는 것도 좋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유 후보를 잘 아는 한 전직 국회의원은 “유 후보가 보수 적자로 살아남아야 차기도 보장받을 수 있다. 수도권으로 간다면 보수의 적자가 아닌 어정쩡한 뜨내기 정치인이 될 것이다. 지금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보수의 근거지인 TK를 중심으로 기반을 잘 다져가야 한다. 유 후보는 자산이 좋은 정치인인데 무기를 더 보강해야 한다. 타협과 아우르는 능력이다. 이 무기만 갖추면 5년 뒤 무난히 선택받는 강한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