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3개월 앞둔 정 병장, 국방부 지하벙커 초소서 희생
-총장공관 초소 점령재탈환 병력과 총격 사망 가족 풍비박산
-“그저 사병인 탓인지 명예회복 움직임도 없어...”
-광주 동신고 총동문회, 고 정선엽 동문 헌수식 개최
광주 동신고등학교 총동문회는 지난달 28일 모교 운동장에서 고 정선엽 동문에 대한 헌수식을 가졌다. <광주 동신고 총동문회 제공>
[광주=일요신문] 조현중 기자 = 광주 동신고등학교 총동문회는 지난달 28일 모교 운동장에서 특별한 헌수식을 가졌다. 지난 1979년 12.12사태 당시 신군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숨진 정선엽 동문의 ‘잊혀진’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무력에 굴복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불법적인 체포를 승인했을 때, 사병은 진짜 군인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초병의 임무를 완수하려다가 국방부에 진입하던 1공수여단의 총을 맞고 사망한 정선엽 병장의 명예는 지켜지지 못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 목숨을 잃은 젊은이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있다.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제23 묘역 38315호 ‘병장 정선엽의 묘’. 우리는 12.12 군사반란이 역사적 심판이 이루어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잘 모른다.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는 아무런 말없이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12·12 군사반란 때 다치고 숨진 사람은 장교만이 아니었다. 당시 숨진 군인은 또 있다. 정 병장은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쟁투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일부 군인들이 상관인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켰다. 그 주동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실세들이었다. 그들의 명령을 받은 최정예 공수부대가 국방부에 쳐들어왔을 때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휘하의 경비 병력에게 국방부 사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언뜻 봐도 살기가 충만한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며 쳐들어오자 이미 기가 죽어버린 경비병들은 총을 버리고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만 제대를 석 달 앞둔 병장 하나는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자기 위치를 지켰다. 공수부대원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했고 병장이 지지 않고 그들에게 발길질을 한 순간 공수부대원들의 총구는 불을 뿜고 말았다. 당시 국방부 헌병대 소속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 조선대 2학년을 다니다 입대한 그는 당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 초소에서 근무하다 국방부를 습격한 신군부 측 병력과 총격전 중 숨졌다. 제대를 불과 3개월을 앞둔 상황이었다. 무고한 젊은이가 반란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고 숨을 거둔 것이다.
한낱 일개 병사였던 그가 왜 동료들은 살아남았는데 죽음을 택했는지 세인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육본의 사수명령과 곧이어 1300여명이나 되는 공수여단 병력이 초소 앞까지 물밀 듯이 쳐들어 왔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2년이 넘는 군인으로서의 생활에 대한 자존심과 그에게 주어진 초병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부하 동료들은 겁에 질려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투항할 때 그는 무장해제하려는 반란군 측 공수여단 병력에 국방부 초병으로서, 떳떳이 자존심을 지키며 저항하다 혈혈단신 산하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희도 당시 여단장의 지시로 반란에 참여했던 1공수여단은 당일 일지에 “벙커 출입구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 체포,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사살됨”이라고 기록했다.
그런 아들을 잃은 어머니 한점순씨는 침묵해야만 했다. 한씨는 1995년에야 겨우 한을 토해냈다. “선엽이가 그때 갖고 있던 총을 순순히 반란군에 건네줬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12·12 반란군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날 “아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전남 영암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려간 한 씨는 피범벅이 된 아들을 보고 혼절했다. “곧 제대해 편히 모시겠다”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 병장은 변을 당하기 일주일 전 형 훈채 씨(44. 은행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으로 유학가고 싶다”며 장래 진로를 상의하기도 했다.
한 씨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아들의 사진과 앨범을 태우며 아예 잊으려고도 했다. 어렴풋이 정 병장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만 알고 있던 가족들은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후에야 한 병사로부터 ‘정 병장 죽음의 진실’을 전해 듣고 또 한번 통곡해야 했다. “그날 새벽 공수부대원들이 총을 쏘며 달려들자 대부분의 초병들이 투항했지만 정 병장만이 유일하게 위치를 사수했습니다. 총을 뺏으려는 공수부대원들을 발로 찼고..., 그때 일제히 총격히 가해졌습니다.”
아들처럼 어머니도 지금은 세상에 없다.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소액의 보상금을 받아온 정 병장의 부모가 숨진 2008년 이후, 보훈처에는 보상금을 받을 정 병장의 유족이 등록돼 있지 않다. 신군부는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국군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했으나 가족들의 눈물겨운 탄원으로 국립묘지에 겨우 안장됐다.
사병인 탓인지 명예회복 움직임은 아예 없다. ‘김오랑 중령 추모회’ 운영자 김준철씨는 “애초 추모 결의안을 청원할 때 김오랑 소령은 물론 정선엽 병장, 박윤관 일병을 포함한 공동 추모비 건립을 청원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시급함 때문에 우선 김오랑 소령 추모비 건립 요구로 한정했다”며 “두 사병에 대한 추모와 기념이 역사바로세우기의 앞으로 남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예비역 육군 준장 표명렬 장군은 “김오랑 중령은 육사동기들의 노력과 정치권의 관심으로 뒤늦게나마 훈장이 추서됐지만 초병으로 끝까지 임무를 다하다 숨진 정 병장에게는 어떤 훈장도 추서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표 장군은 또 “훈장도 계급에 따라가는 것 같다”며 “무공훈장 중 최고등급인 태극무공 훈장의 경우 실제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병사들이 받은 사례는 3~4건밖에 없고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형 훈채 씨는 “개인적으로는 모두 용서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이 기회에 정의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임무에 충실했던 동생에게 훈장이라도 추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현모 동신고 총동문회장은 이날 헌수식에서 “고 정선엽 동문의 의로운 군인정신을 되새기고 후배들에게 참다운 뜻을 전하는 동시에 광주 5.18정신을 모독하고 있는 전두환씨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한 헌수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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