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 ||
현재 일본 왕실은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와 그 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왕자 부처 모두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 왕위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져 있다. 왕실에서 가장 최근에 태어난 남자가 올해 마흔이 되는 아키시노노미야 왕자일 정도다.
지난 1월25일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有識者)회의’가 처음 열렸다. 회의의 목적은 황실전범을 개정해 여왕의 가능성을 터놓자는 것. 하지만 이 회의에 참석한 열 명의 멤버는 왕실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인 그리스 철학 전문가 구보 교수는 “왕실에 관계된 일이라면 그에 관한 전문가들도 많은데, 어째서 전혀 분야도 다른 내가 여기에 선택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며 당혹감을 나타냈다.
왕실업무를 관장하는 궁내청의 한 간부는 이번 유식자회의에 대해 “각계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을 가능한 많이 끌어 모아 여왕 용인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뻔히 보인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번 문제와 관련해 당사자인 왕실의 의견은 어떨까. 어렸을 때부터 일왕과 함께 공부를 했다는 전직 교도통신 기자인 하시모토씨는 “궁내청은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집단인 반면, 국왕 자신은 생물학을 공부한 과학자로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따라서 국왕은 남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일본 왕실 가족 사진. 가운데는 아키히토 일왕 부부, 양쪽 가장자리는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와 딸, 뒤로는 아키시노노미야 왕자 부부와 두 딸, 그리고 뒷줄 오른쪽은 노리노미야 공주다. | ||
왕실과 대립하면서까지 궁내청이 여왕 제도에 반대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유식자회의를 소집한 고이즈미 총리가 왕실을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
유식자회의는 앞으로 매달 열리며 올해 가을에는 결론을 내서, 내년에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여론조사에서도 80% 이상이 여왕제를 용인했으며, 또 이를 강하게 반대하는 당도 없으니 법안이 가결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 매스컴도 고이즈미 총리가 황실전범 개정을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며 그 의도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은 지금까지 몇 가지 개혁을 추진해왔으나 국민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우체국 민영화나 북한 문제 등도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그런 총리에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이 바로 ‘황실전범의 개정’인 셈이다. 그래서 남은 임기 1년8개월 동안 어떻게든 이를 추진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또한 여아계승을 논의하기 이전에 남아계승 방법을 찾는 것이 순서임에도 고이즈미 정권은 다른 방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여왕을 용인한다는 전제 하에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궁내청은 고이즈미 정부가 여왕제 도입을 우체국 민영화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며 화가 나 있는 상태다. 전직 궁내청 담당기자는 “황실전범 개정에는 적어도 1년 정도의 논의가 필요하고 이러한 전문적인 일은 ‘유식자회의’가 아니라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설명한다.
현재 왕위를 계승할 남아가 부족하다는 현실과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공적을 쌓으려는 고이즈미 총리, 남아 승계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궁내청, 과연 일본 국민들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