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왼쪽),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 ||
현재 당권을 놓고 여러 쟁쟁한 주자들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향수는 당내 인사들과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자극하는 듯하다. 실제로 박빙 승부를 연출한 대선의 잔향이라고만 보기엔 한나라당 내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이 전 총재를 향한 손짓이 너무 거세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몇몇 의원들은 개별적으로 이 전 총재를 만나러 미국까지 다녀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탓인지 이 전 총재의 한나라당에 대한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심지어는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을 원격 조종한다는 이른바 ‘리모컨론’까지 나올 정도다.
최근 서청원 전 대표의 행보를 둘러싼 정가의 소문에도 이런 시각이 깔려 있다. ‘대표직 2선 후퇴’를 선언하고 미국에 갔던 서 전 대표가 지난 2월18일 귀국한 뒤부터 ‘서 전 대표가 이회창 전 총재와 만나 당내 문제에 대한 많은 의견을 나눴다’는 이야기와 함께 ‘대표 도전설’ 등 갖가지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 과정을 총괄했던 서 전 대표는 대선 이후 패배 책임을 지고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최근 쇄신을 요구해온 한나라당 내 개혁파의 위세가 눌리면서 서 전 대표가 자신의 선언을 ‘번복’하고 전당대회에 출마할 것이라는 관측이 떠오르고 있다.
한나라당 안팎에선 이회창, 서청원 두 사람이 미국에서 만나 당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는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정가에선 ‘일부 이 전 총재 측근들이 서 전 대표에 대한 적극 협력을 다짐했다’는 설도 퍼진 상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전 총재는 확실한 구심점이 없는 현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라며 “만약 국내 정치권으로 컴백할 경우를 대비한다면 자신의 향후 입지를 도모할 수 있는 차기 당권주자를 선택해 그에 대한 후원을 고려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만약 서 전 대표가 이 전 총재 측근들을 통해 지지 저변을 넓혀 당권을 장악한다면 향후 이 전 총재의 한나라당에 대한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서 전 대표측은 ‘서 전 대표와 이 전 총재의 교감’에 대한 정가의 갖가지 소문에 대해 부인도 시인도 않고 있다. 서 전 대표측의 한 관계자는 “(서 전 대표가) 미국에서 이 전 총재와 만난 것은 사실”이라며 “이 전 총재가 샌프란시스코에 오기 전부터 그곳에 머물고 있던 서 전 대표가 직접 공항까지 마중나갔다”고 밝혔다. 서 전 대표측에 따르면 서 전 대표는 귀국 전까지 이 전 총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이 전 총재와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서 전 대표의) 언급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 전 대표의 차기 당권 출마에 대한 당내의 반발 강도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이 전 총재를 보좌해온 한 핵심측근은 “서 전 대표가 출마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인가”라고 되물으며 “그렇게 되면 당이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대통령 후보 시절 이 전 총재 보좌역을 지낸 한 인사도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이 오히려 더 설치고 다니는 것은 당에 해로운 일”이라며 서 전 대표의 출마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 시절 보좌했던 측근 인사들은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 가능성이 절대 없으며 이 전 총재 본인 역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고 전한다. 이 전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이 전 총재가) 차기 당대표로 누군가를 의중에 두었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며 그런 오해를 살 일도 (이 전 총재가)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측근 인사는 “샌프란시스코에 먼저 가 있던 서 전 대표가 이 전 총재 마중은 나왔겠지만 (이 전 총재가) 정치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대화는 절대 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측근인사는 “이 전 총재 측근들 중 일부 인사들이 특정 당권주자를 지원한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며 “내가 특정 주자를 지원한다는 소문에 다른 주자측에서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인사는 “국내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전 총재의 강한 뜻이며 우리들(측근들)에게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삼가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측근 인사는 “이 전 총재 측근들이 개인적인 자리에서 당권 향배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을 피력할 수는 있지만 합심해서 특정 주자를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오히려 당권을 노리는 인사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창심’(昌心 : 이회창 전 총재의 마음)을 얻었다고 떠벌리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모두가 전당대회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서 전 대표가 미국에 다녀온 이후로 이 전 총재와의 교감설이 정가에 나도는 것도 그런 차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권 경쟁이 치열해지면 유력 주자들이 저마다 ‘창심’을 얻었다는 얘기를 주변에 흘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한편 정가에선 재검표 소동 등을 이유로 이 전 총재가 서 전 대표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정반대의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무리한 당선무효소송과 재검표 추진에 앞장섰다가 낭패를 본 것은 이 전 총재를 두 번 죽인 셈인데 그런 서 전 대표에 대해 이 전 총재가 호감을 갖겠는가”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대선기간에 서 전 대표가 주변에 자기 사람을 많이 모아뒀다”며 “이 전 총재가 만약 국내정치 복귀를 고려한다면 ‘사심’이 강해 보이는 서 전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 전 대표측은 “재검표 추진은 예상 못한 대선 패배로 인한 당 전체의 허탈감을 달래주기 위한 필연적 조치였다”며 “이 전 총재 입장에서 대선기간에 가장 가깝게 일해온 서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조금은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 밝혔다.
이 전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이 전 총재 자신이 정계복귀에 회의적인데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느냐 마느냐 하는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이렇듯 여러 관계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내부에선 이회창 전 총재의 ‘보이지 않는 손’이 향후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란 관측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 당권에 대한 ‘창심’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만 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