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 등 선진국에서 이론과 다른 현상…노조 몰락 등이 원인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일본의 대학졸업자 취업률은 97.6%, 고졸취업률은 99%다. 자발적으로 구직을 포기한 사람조차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일본은 일손이 부족해 제도적으로 ‘투잡’을 용인해주고 있으며, 정년을 70대로 높이고 가정주부의 경제활동을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임금상승률은 마찬가지로 0%대다. 올해 여름 보너스도 대폭 삭감됐다. 공급과 수요라는 경제학의 일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셈이다.
부동산·주식 등 세계적으로 안 오르는 게 없다지만 유독 월급만은 오르지 않는다. 선진국 경기가 개선되면서 곳곳에서 구인난을 호소하지만 정작 급여 인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가장 큰 고민인 인플레이션율 정체도 임금이 오르면 자연스레 해결될 텐데 말이다. 어째서 임금은 치고 오르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걸까.
임금 정체의 이유로 여러 가설이 등장한다. 먼저 협상력의 저하다. 기업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하고, 사측이 제시하는 임금 인상안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다 보니 임금 상승이 정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조직률은 저임금 해외 근로자의 채용 증가 등으로 하락했다. 글로벌 헤드헌팅 회사인 ‘맨파워그룹’의 조나스 파라이싱 회장은 “해외에서 인건비가 저렴한 직원들이 유입되는 점도 노동자의 협상력을 약화시킨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를 보면 2016년 노조에 가입된 노동자는 11%에 불과했다. 1983년 20%의 절반 수준이다. 미국의 시간당 임금은 1970년 3.93달러에서 1980년 9.12달러, 1990년 14.41달러로 껑충 뛰었지만 2000년 19.36달러로 상승률이 정체되고 있다. 경기호조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강한 노조 쟁의활동이 노사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해왔는데, 노조가 몰락하면서 임금 협상력이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또 노동자의 임금이 극히 낮았던 1950~1960년대와 달리 1980~1990년대 임금이 가파르게 오른 덕에 노조 활동이 동력을 잃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는 “낮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노동자들이 현재 임금에 만족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업률이 떨어지는데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 원인으로 노동조합의 협상력 약화가 꼽힌다. 미국의 대표적인 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의 행사 모습. 사진=UAW 홈페이지
이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앞만 보고 달리던 고성장 시기에서 벗어나면서 인재 영입에 고액 연봉을 배팅하기보다는 기존 직원들의 이탈을 막는 선에서 기업을 ‘관리’하는 경영 형태가 일반화됐다. 전반적으로 대규모 신규 채용을 줄이고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만 인력을 확보하는 문화가 정착된 것은 전 세계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노동생산성 정체도 이유로 제기된다. 기업들이 설비현대화나 기술혁신에 투자하기보다는 인건비와 물류비 등 비용이 저렴한 곳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면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노동자 역시 받을 수 있는 한계 임금이 낮다는 판단에 생산성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 노동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6개 분기 중 4개 분기동안 시간당 생산성은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역시 인건비 인상을 받아줄 리 없다.
이런 이유로 실업률과 임금(물가)상승률이 역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필립스곡선(Phillips‘s curve)’ 이론이 깨졌다는 관측도 있다. 필립스곡선은 임금인상이 세로축, 실업률이 가로축이며, 우하향한다. 실업률이 내리면 임금인상률은 오르고 실업률이 오르면 임금인상률은 떨어진다는 설명으로 노동과 관련한 주류 경제학의 일반론이다.
최근 이 이론이 현실과 들어맞지 않자 미국 ‘포브스’의 수석편집장이자 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스티브 포브스는 “필립스곡선은 엉터리 이론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노사관계나 고용의 해외 전이 등 고용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수요·공급 이론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준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제레미 네일웨이크는 지난해 논문에서 “임금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실업률 구간이 있으며, 그 구간을 지나 실업률이 더 내려가면 임금은 가파르게 오른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미국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과도하게 낮은 실업률이 지속될 경우 물가가 한숨에 치솟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이유로 연준의 대표적인 비둘기파인 보스턴 연은 총재인 에릭 로젠그렌은 최근 매파로 입장을 선회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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