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 타순이 아닌데…’ 류중일도 실수로 진땀
지난 16일 투수 노경은은 프로 데뷔 이후 최초로 타석에 들어섰다. SBS SPORTS 중계화면 캡처.
오더가 완성되면, 경기 시작 예정 1시간 전에 주심이 홈 플레이트 앞에서 양 팀 담당 코치를 만나 타순 표를 주고받는다. 야구 규칙에는 ‘양 팀 감독이 만난다’고 명시돼 있지만 경기 준비 과정의 효율성을 고려해 대부분 타격코치나 1군의 막내 코치들이 나와 오더를 교환한다. 이때 주심이 양 팀 타순표의 정본(正本)과 부본(副本)이 동일한지 확인한 뒤, 상대팀 부본을 양 팀에 나눠준다. 이 순간 각 팀의 타순은 확정된다. 이후로는 별도 규칙으로 정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타순 표 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권한도 심판에게 이관된다.
따라서 배팅오더를 최종 제출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교차 검토를 거쳐야 한다. 실수로 잘못된 오더를 내거나 선수가 타순을 잘못 숙지하고 경기에 나선다면, 그 피해가 팀에 고스란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 ‘느그가 프로가’ 배팅오더 잘못 내 망신당한 롯데
최근에도 배팅오더 확인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해프닝이 벌어졌다. 롯데가 그 황당한 사건의 장본인이다. 6월 16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넥센과의 원정 경기. 롯데의 1회초 공격이 끝난 뒤 1회말 넥센 공격 도중 갑자기 경기가 중단됐다. 장정석 넥센 감독이 나와 “출전 선수 명단에 지명타자로 올라와 있는 최준석이 1루수로 나왔다”고 항의했다. 실제로 그랬다. 1루에는 최준석이 서 있었지만 전광판에는 이대호가 1루수, 최준석이 지명타자로 각각 표기돼 있었다.
의아한 상황이었다. 경기 전 조원우 롯데 감독은 취재진에게 “1루수로 최준석, 지명타자로 이대호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의 말대로 최준석이 1회말 1루수로 나와 수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직 배팅오더에만 둘의 포지션이 뒤바뀌어 기재된 것이다. 정작 롯데 벤치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넥센이 깨닫고 문제를 삼았다.
심판진은 한데 모여 회의를 했다. 결국 원래 제출한 오더를 바탕으로 롯데가 1루수를 이대호에서 최준석으로 교체한 것으로 간주했다. 최준석이 계속 1루수를 맡는 대신 원래 배치됐던 지명타자 자리가 소멸되면서 이대호가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명타자는 원래 투수 대신 공격을 하는 자리다. 수비 포지션 없이 오로지 타격만 한다. 따라서 지명타자가 수비로 나가면 그 자리에는 ‘1번’ 야수인 투수가 들어가야 한다. 선수 교체가 바쁘게 이뤄지는 경기 후반에는 가끔 볼 수 있는 장면. 그러나 타순 표 기재 실수로 1회부터 지명타자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결국 롯데는 4번 타자 이대호를 한 타석 만에 잃어 버렸다. 대신 선발 투수 노경은이 4번 타순에 이름을 올렸다.
전광판 라인업 4번타자 자리에 노경은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모습. SBS SPORTS 중계화면 캡처.
롯데는 3연패 중이었다. 심지어 이날 선발 투수였던 노경은이 6이닝 2실점으로 시즌 최고의 피칭을 했다. 타선이 점수를 조금만 더 뽑았다면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그러나 4번 타자 이대호의 공백이 유독 커보였다. ‘4번 타자’ 노경은이 타석에 들어선 4회와 6회에 모두 주자가 1루에 있었지만, 호투하는 선발 투수에게 안타까지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노경은은 두 차례 모두 삼진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경기는 최종 스코어 1-2로 끝났다. 4연패였다.
아마 야구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해프닝에 야구팬의 비난이 쏟아졌다. 롯데로서는 ‘기본’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너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 됐다. 조원우 롯데 감독은 다음 날 “모든 건 배팅오더를 크로스체크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상황이 많이 복잡했다. 손아섭, 김상호, 강민호를 비롯해 출전을 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했던 선수가 많아 오더를 여러 장 썼다”며 “전달 과정에서 이대호가 지명타자로 적힌 오더가 잘못 전달되는 실수가 나왔다”고 해명했다.
# 류중일 전 감독이 오더 실수로 가슴 쓸어내린 사연
사실 과거에도 비슷한 일로 가슴을 쓸어내린 감독들이 종종 나왔다. 삼성을 정규시즌 5연패와 통합 4연패로 이끌었던 류중일 전 감독도 그랬다. 류 감독은 2012년 6월 14일 잠실 두산전에서 4번 타순에 최형우의 이름이 적힌 오더를 잘못 제출했다가 뒤늦게 깜짝 놀랐다. 최형우는 지난해까지 삼성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다 올해 KIA로 옮긴 뒤에도 다시 4번 타자로 승승장구하는 선수. 그러나 당시만 해도 삼성 4번 타자 자리는 아직 다른 선수의 몫이었다. 류 감독도 “언젠가는 우리 팀 4번 타자로 맹활약해줄 타자지만, 아직은 4번 타순에 고정할 시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된 뒤 전광판을 보니 4번 자리에 최형우의 이름이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경기 도중 애꿎은 선수를 빼거나 투수를 타자로 기용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생각과는 다른 오더로 경기를 치르게 된 류 감독으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경기 내내 진땀을 흘린 류 감독은 다음 날 “원래 선수단 라커에 써 놓은 오더에는 최형우가 4번이 아닌 3번으로 들어가 있었다. 4번은 이승엽이었다. 그런데 기록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기가 나왔던 것 같다”며 “수석코치와 의견을 나누다가 서로 착각한 부분이 있었다. 최형우의 타구 질이 다 좋기는 했지만, 의도했던 자리는 아니라 난감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 후 류 감독은 ‘최종 제출 직전 오더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팀 미팅 때 오더를 확정해 통보한 뒤, 상대팀과 오더를 교환하기 전 한 차례 더 꼼꼼하게 훑어봤다. 류 감독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난감한 경험으로 좋은 습관이 생긴 것 같다”며 그 경기를 떠올리곤 했다.
# 감독들은 어떤 기준으로 오더를 짜나
타순에는 감독의 전략과 전술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감독들은 작은 변화에도 신중하게 반응한다. 기본적으로 라인업을 구성하는 원칙은 대개 비슷하다. 첫째는 팀별 투수별 상대성적 고려, 둘째는 타자의 컨디션 파악, 셋째는 상대투수에 대한 전략, 넷째는 흐름과 직감이다. 감독의 성향에 따라 타순의 색깔도 달라진다.
감독 통산 최다승 2위와 3위에 올라 있는 김성근 전 한화 감독과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은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르다. 김인식 감독은 경기 전 타격코치가 쓴 타순을 받아본 뒤 특별한 복안이나 변동사항이 있을 때만 일부 변화를 줬다. 무엇보다 부상이나 슬럼프 같은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시즌 내내 고정타순이 유지되는 것이 좋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타자마다 타순에 대한 역할을 인식하고 적응력과 면역력이 생겨야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인식 감독을 대표하는 단어인 ‘믿음의 야구’도 이런 성향의 연장선상이다.
반대로 김성근 감독은 경기마다 최대한 타순을 바꿨다. SK 시절에는 같은 라인업으로 치른 경기를 한 시즌 내내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다. 이틀 연속 같은 선발 라인업을 내세우는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경기 타순을 구상하고, 때로는 선발 오더만 7~8개씩 만든 뒤 직감이나 원칙에 따라 하나를 골랐다. 김성근 감독은 “타순을 짤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타구 하나에 한 베이스를 더 가는 타자들이 많은 팀을 만나면 외야진도 수비 위주로 짰다. 반면 장타력이 있지만 기동력이 약한 팀을 만나면 우리 수비수도 발은 느리더라도 공격력이 강한 타자로 구성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밀했다.
두 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베테랑 감독들도 나름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타순을 정한다. 팬들 눈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여도 감독들의 작전이 담겨 있다. 조범현 전 kt 감독은 “상대 선발투수가 강하면 좌완이냐 우완이냐에 따라 6이닝 이상 상대할 수 있는 타순을 구성한다. 그러나 상대투수가 약하면 상대 불펜투수를 공략하기 위해 대타와 대수비, 대주자 기용 등을 미리 내다보고 타순을 짠다”고 했다. 김시진 전 롯데 감독도 “투수 출신 감독은 대개 좌-우-좌-우 지그재그 타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승부처에서 상대 핵심 불펜 좌투수가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확실한 주전선수가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때는 감독들도 갈림길에 선다. 다시 감을 찾을 때까지 계속 믿고 경기에 기용하느냐, 혹은 잠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해 휴식을 취하고 숨을 돌리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빙그레 시절 김영덕 감독은 최고의 4번타자 장종훈이 슬럼프에 빠지자 독특한 해결책을 썼다. ‘한 타석이라도 더 들어서서 공 하나라도 더 보라’는 의미에서 ‘홈런왕’ 장종훈을 1번에 배치했다. 결국 장종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을 되찾았고, 다시 4번으로 돌아왔다.
물론 감독의 성향과는 별개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많은 감독들은 “상위 팀들은 타순의 변화가 심하지 않고, 바뀌더라도 한두 자리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하위 팀들은 시즌 중 선발 라인업은 물론 엔트리 변화도 많다”고 귀띔했다. 확실한 주전과 백업이 갖춰진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배팅오더는 그만큼 천지차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선발 투수 예고 없던 과거엔 ‘위장오더’ 횡행 롯데의 사례가 보여주듯, 배팅오더에는 의외로 엄격한 규제 사항이 숨어 있다. 일단 오더를 교환한 뒤에는 웬만해선 선수를 교체할 수 없다는 원칙이 가장 그렇다. 예전부터 이로 인해 수많은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다. 2005년 6월 6일 청주 한화-두산전이 그랬다. 이미 양 팀이 오더를 완성해놓은 상황에서 두산 7번 타자로 이름을 올린 외야수 강봉규가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했다. 양 팀 코치가 막 오더를 교환하고 돌아서려는 찰나에 김경문 당시 두산 감독이 달려나와 강봉규의 교체를 요청했다. 일단 심판이 양 팀에 상대 팀 오더를 전달한 뒤에는 ‘교체 불가’라는 규칙의 효력이 시작된다. 따라서 심판진은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을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고의성이 있을 리 만무한 상황이라 김인식 감독도 흔쾌히 동의했다. 결국 두산은 강봉규 대신 문희성을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애매한 상황은 그 후에 나왔다. 경기가 시작된 뒤 복통에서 해방된 강봉규는 더그아웃 앞에 나와 스윙을 시작했다. 언제든 감독이 원한다면 대타로 나설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어차피 규정상 그는 그 경기에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기 개시 전 부득이한 이유로 선발 라인업을 교체했다면, 라인업에서 빠진 선수는 경기 출전 불가능 선수로 분류돼 해당 경기에 뛸 수 없다. 결국 강봉규는 대타로도 기용되지 않고 경기가 종료됐다. 혹여 한 타석이라도 들어섰다면 논란이 됐을 만한 장면이다. 사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이 생기게 된 것은 선발 투수 예고제가 없었던 프로야구 초창기에 ‘위장 오더’ 해프닝이 종종 벌어졌던 탓이다. 일부 감독은 선수 한두 명을 위장으로 오더에 적어 놓았다가 당일 선발 투수가 왼손이냐 오른손이냐에 따라 경기 개시 직후 다른 선수로 교체하는 작전을 쓰곤 했다. 심지어 LG 투수 김건우는 1997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앞두고 선발 좌익수로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삼성 선발이 오른손 김상엽으로 확인된 뒤 곧바로 좌타자인 동봉철로 교체됐다. 심지어 그가 그해 10월 19일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그날의 위장 오더는 LG 팬들의 성토 대상이 됐다. 1991년 7월 14일에는 해태 김응용 감독과 삼성 김성근 감독이 ‘이중 오더’ 문제로 신경전을 벌였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해태의 경기에 앞서 삼성이 몰래 두 장의 오더를 준비했다가 발각됐기 때문이다. 한 장은 오른손 선동열을 대비한 타순이었고, 다른 한 장은 왼손 김정수를 상대하기 위한 타순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지령을 받은 배대웅 코치는 해태가 심판에게 오더를 제출하자마자 상대 선발 투수가 누구인지 물었다. 주심은 “선동열”이라고 대답했고, 배 코치는 곧바로 양쪽 뒷주머니에 하나씩 꽂힌 오더 두 장 가운데 선동열 상대 오더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오더 교환 임무를 맡은 해태 김봉연 코치가 이 장면을 캐치했다. 곧바로 배 코치의 뒷주머니를 확인해 두 장의 오더를 발견했다. 이 얘기를 들은 김응용 감독은 “이대로는 경기를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화를 내며 버텼다. 결국 속이 탄 심판이 30분간 중재에 나선 끝에 경기가 무사히 재개됐다. 오더 관련 규칙이 세분화되고 선발 투수가 철저하게 예고되는 현대 야구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