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선동열’ 김진우, 18번 입단 선물 무산
은퇴 기자회견 당시 이병규. 연합뉴스
# 이병규의 9번, 역대 13번째 영구 결번으로 지정
최근 KBO 리그에 영구 결번 하나가 추가됐다. LG가 7월 9일자로 ‘9번’의 영구 결번을 선포한다. 지난해 은퇴한 ‘적토마’ 이병규의 등번호다. 이날 이병규의 은퇴식을 열면서 동시에 9번을 영구 결번으로 묶는다. 역대 13번째이자 LG 선수로는 김용수의 41번에 이어 두 번째 영구 결번. 2014년 SK 박경완의 26번 이후 3년 만에 새 영구 결번이 나왔다.
대단한 선수였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7년 LG에 입단한 뒤 곧바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리그 최고의 콘택트 능력을 자랑했다. 프로 17시즌 동안 1741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311(6571타수 2043안타) 161홈런 972타점 992득점 147도루라는 기록을 남겼다. 타격왕 2회, 최다안타왕 4회를 각각 수상했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도 여섯 번이나 가져가 이 부문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했다. 역대 최소경기 2000안타와 10타석 연속 안타 신기록,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도 이병규가 남긴 발자취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한국 야구 대표팀의 영광도 함께했다.
이병규의 영구 결번이 더 눈에 띄는 이유는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이라는 점이다. 이병규도 1997년, 1998년, 2002년 한국시리즈에 출전했지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준우승의 아쉬움을 삼켰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서 뛰던 2007년에 재팬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게 전부다. 그러나 LG는 이병규라는 선수가 팀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충분히 인정했다. LG를 넘어 KBO 리그 전체를 ‘안타’로 뒤흔들었던 선수였다. LG 시절 내내 등 뒤에 달았던 숫자 ‘9’가 영원히 결번으로 남게 되면서 이병규는 한 차원 더 높은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양준혁 10번 영구 결번. 연합뉴스
KBO 리그 사상 첫 영구 결번은 1986년 세상을 떠난 OB 김영신의 54번이다. 김영신은 1984년 LA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듬해 OB에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1986년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급류에 휘말려 변을 당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성적비관으로 인한 자살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OB는 영구 결번 지정으로 그를 애도했다.
선수 시절의 명예를 바탕으로 지정된 첫 영구 결번의 주인공은 역시 ‘국보’ 선동열(해태)이다. 해태에서 18번을 달고 뛴 선동열이 1996년 일본 주니치에 임대 선수로 떠나면서 그 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묶였다. 해태는 선동열이 국내로 복귀하면 다시 그 번호를 달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동열이 1999년 일본에서 은퇴하면서 다시는 18번을 단 타이거즈 선수를 볼 수 없게 됐다.
사실 18번의 영구 결번 지정과 철회를 두고 작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2001년 해태를 인수한 KIA는 2002년 특급 신인 김진우가 입단하자 18번을 선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설 선동열의 등번호를 ‘제2의 선동열’로 통하는 후배 투수가 대물림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KBO 리그 역대 최고 투수 선동열을 여전히 그리워하던 팬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KIA는 예기치 못한 팬들의 항의 세례에 즉각 그 계획을 백지화시켜야 했다.
# 최동원의 11번, 영구 결번까지 23년 걸렸다
그 다음은 LG 김용수의 차례였다. 그는 2000년 은퇴했지만, 아직 현역 선수 신분이던 1999년 그의 등번호 41번이 역대 세 번째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역대 최초로 현역 선수의 영구 결번식도 열렸다. KBO 리그 사상 처음으로 100승-200세이브를 동시 달성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반대로 은퇴 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영구 결번의 영광을 안게 된 레전드들도 있다. 삼성 이만수는 1997년 은퇴 후 7년이 지난 2004년에 등번호 22번을 삼성 영구 결번으로 남겼다. 은퇴 과정에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면서 흐지부지 유니폼을 벗었지만, 골수팬들이 7년에 걸쳐 구단에 요청을 거듭해 결국 꿈이 이뤄졌다.
박철순 21번 영구 결번_연합뉴스
롯데 역시 1984년 한국시리즈 4승 신화에 빛나는 ‘안경 에이스’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너무 늦게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의 등번호가 사직구장 한 쪽에 자리하기까지 무려 2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88년 롯데를 떠나 1990년 삼성에서 은퇴한 최동원은 2011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롯데는 비로소 최동원의 추모식을 열고 영구 결번을 선포했다. 팀의 첫 우승을 팔 하나로 짊어졌던 에이스의 숫자를 팀에 영원히 기록했다.
# 올해 14번째 영구 결번이 탄생한다
그 뒤에는 한화가 영구 결번 릴레이를 펼쳤다. 연습생 신화를 쓴 홈런왕 장종훈의 35번을 2005년 구단 첫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9년에는 1990년대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정민철의 23번과 KBO 리그 역대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의 21번을 연이어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한화는 현재 KBO 리그 구단 가운데 가장 영구 결번을 많이 보유한 구단이다.
KIA는 선동열에 이어 2012년 이종범의 7번을 광주 그라운드에 묻었고, 삼성도 KBO 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남기고 떠난 양준혁의 10번을 2010년 영구 결번 리스트에 올렸다. 역대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박경완은 2014년 은퇴하면서 26번을 SK 영구 결번으로 남겼다. 이 대열에 이병규가 합류하면서 영구 결번 13명은 투수 6명, 포수 3명, 야수 4명으로 기록됐다.
머지않아 KBO 리그에는 14번째 영구 결번도 추가될 예정이다. 삼성 이승엽이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삼성은 이미 잠정적으로 이승엽의 등번호 36번을 영구 결번으로 결정해 놓았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승엽은 삼성을 넘어 KBO 리그 역대 최고 타자로 꼽힌다. 올해 그 마지막 여정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동원 11번 영구 결번. 연합뉴스
한화는 LA 다저스로 떠난 류현진의 등번호 99번을 계속 비워 놓았다. 공식적으로 ‘결번’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아무도 달 수 없는 번호다. 구단도 다른 선수에게 줄 계획이 없고, 다른 선수도 그 번호를 달 생각이 없다. 2006년 KBO 리그에서 데뷔한 뒤 7년간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면서 한화를 ‘먹여 살린’ 류현진이다. 한화는 먼 훗날 류현진이 한화로 돌아와 다시 그 번호를 달고 공을 던져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메이저리거는 가질 수 없는 ‘42번’ 올해 한화에 입단한 외국인 투수 카를로스 비야누에바는 등번호 42번을 달고 뛴다. 스스로 선택한 번호는 아니다. 42번은 그동안 한화 외국인 선수들이 종종 달았던 번호다. 한화는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비야누에바에게도 이 번호를 배정했다. 그런데 42번이 적힌 유니폼을 받아든 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내가 정말 이 번호를 써도 되느냐?”고 물은 것이다. “당연히 써도 된다”는 구단 관계자의 말을 듣고는 “정말이냐?”고 몇 번씩 확인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운영팀 관계자가 이유를 묻자 비야누에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42번은 고(故)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라 미국에서는 이 번호를 아무도 새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 번호를 달 수 있다니 정말 영광스럽다.” 그제야 한화 관계자들은 무릎을 쳤다. 비야누에바. 연합뉴스 1972년 사망한 로빈슨은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활약한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였다. 1962년 흑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선수 생활 내내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미국 내 흑인 선수들의 인권 향상에 큰 공을 세웠다. 메이저리그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1954년에는 미국 대법원의 인종차별 위헌 결정과 인종차별 금지 민권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구 결번 선포 이전에 42번을 받았던 선수들은 그대로 등번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42번 선수’였던 양키스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2013년 은퇴하면서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는 등번호 42번을 단 선수가 남아 있지 않게 됐다. 흑인인 리베라는 1996년까지 불펜으로 활약했지만, 42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1997년부터 마무리 투수를 맡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클로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리베라가 선수 생활에 명예로운 마침표를 찍으면서 마침내 42번의 전 구단 영구 결번이 완성됐다. 비야누에바가 “한국에서는 42번을 달아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유독 환호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11시즌을 활약했던 그에게 ‘42’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번호이자 영웅의 상징과도 같은 숫자였다. 한화 관계자들도 비야누에바의 이런 반응에 흐뭇해했다. “그동안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이 번호를 거쳐 갔지만, 로빈슨을 언급한 선수는 없었다”고 귀띔했다. [은] |
양키스에 한자릿수 등번호가 없는 까닭? 1부터 9까지 레전드 오브 레전드 ‘꽉’ 1901년 창단한 뉴욕 양키스는 세계 최고의 리그인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 명문 구단으로 인정받는 팀이다. 양키스의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은 전 세계 야구 선수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고, 많은 선수들이 은퇴 전 꼭 한 번 몸담고 싶은 구단으로 양키스를 꼽는다.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거쳐 간 팀답게 영구 결번도 가장 많다. 무려 22명의 선수가 양키스 영구 결번의 영광을 안았다. 1939년 루 게릭의 4번이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이자 구단 첫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게 시작이었고, 지난 5월 데릭 지터의 2번을 영구 결번으로 선포한 게 가장 최근이다. 무엇보다 양키스 선수들은 더 이상 한 자릿수 등번호를 달 수 없다는 게 가장 눈에 띈다. 1번부터 9번까지 모조리 영구 결번으로 묶여 있다. 모두 납득할 만한 레전드들이다. 양키스 감독을 다섯 차례나 맡았던 빌리 마틴이 1번, 다섯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영원한 주장’ 지터가 2번,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3번을 각각 양키스 영구 결번으로 새겼다. 4번은 2130경기에 연속 출장했던 ‘철마’ 루 게릭, 5번은 56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던 명 타자 조 디마지오, 6번은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양키스 지휘봉을 잡고 월드시리즈 4회 우승을 이끌었던 조 토레 감독이 각각 갖고 있다. 7번은 양키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곱 번이나 경험한 스위치히터 미키 맨틀의 번호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일곱 개를 갖고 있는 빌 디키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요기 베라는 1972년 나란히 8번을 공동 영구 결번으로 기록했다. 9번은 로저 매리스의 차지다. 1961년 홈런 61개를 때려내 당시 베이브 루스가 갖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한 선수다. 물론 이 외에도 등번호 13개가 더 남아있다. 필 리주토의 10번, 서먼 먼슨의 15번, 화이티 포드의 16번, 호르헤 포사다의 20번, 돈 매팅리의 23번, 엘스턴 하워드의 32번, 케이시 스텐겔의 37번, 마리아노 리베라의 42번(재키 로빈슨의 42번과 별도로 지정), 레지 잭슨의 44번, 앤디 페티트의 46번, 론 기드리의 49번, 버니 윌리엄스의 51번이 모두 영구 결번이다. 양키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대표 선수들의 과거를 구단의 현재 안에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길고 묵직한 양키스의 영구 결번 리스트는 팀의 화려한 유산과 남다른 자부심을 반영한다. 새로운 선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등번호의 범위가 너무 좁아졌다는 게 유일한 흠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