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모습을 담은 ‘위안부’ 사진은 세상에 공개돼 한국인 ‘위안부’의 참상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됐다. 특히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준비 과정에서 피해자 박영심(1993년 피해 증언, ‘06년 별세) 할머니가 사진 속 만삭의 여성이 자신이라고 스스로 밝히며 다시 한번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17년, 당시 사진 속 송산에 포로로 잡혀있던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를 촬영한 18초짜리 흑백 영상이 발굴, 공개됐다. 그동안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증언, 문서, 사진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실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는 것은 세계 최초다.
영상 속에는 중국 송산에서 포로로 잡힌 한국인 위안부를 포함해 7명의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미‧중연합군 산하 제8군사령부 참모장교 신 카이(Shin Kai) 대위(중국군 장교)로 추정되는 남성은 한 명의 ‘위안부’ 여성과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나머지 여성들은 초조하거나 두려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다.
영상 속 장소는 미‧중연합군 제8군 사령부가 임시로 사용한 민가 건물로, 이곳에서 ‘위안부’ 포로 심문(Interrogation)이 이루어졌다. 포로로 잡혔을 당시 만삭이었던 고(故) 박영심 할머니는 탈출 과정에서 사산해 중국군의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44년 미군이 촬영…美국립문서기록관리청 내 필름 릴(reel) 수백 통 일일이 확인해 발굴>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이하 서울대 연구팀)는 2년여 간의 끈질긴 발굴 조사 끝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2관에서 70년 넘게 잠자고 있던 한국인 위안부 영상을 발굴했다고 밝히고, 5일(수)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미‧중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164통신대 사진대 배속 사진병(에드워드 페이(Edwards C. Fay) 병장 추정)이 1944년 9월 8일 직후 촬영해 소장했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이 영상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은 후 2년 전부터 기발굴된 문서와 사진 등을 분석해 관련 정보를 추적하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필름 릴(reel) 가운데 수백 통을 일일이 확인해 이번 영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영상은 미‧중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164 통신대, 사진대 배속 사진병<페이(Edwards C. Fay) 병장 추정>이 1944년 9월 8일 직후 촬영한 것이다.
발굴 조사는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기록물로 관리해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서울시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의 하나로 이뤄졌다.
’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초 증언한 이후 그동안은 239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위주로 연구가 이뤄졌지만 이제 생존 피해자가 38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기록물 조사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이 시와 연구팀의 입장이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일본 정부‧군의 공문서가 압도적으로 많이 활용되고 국내 연구자들의 문서 접근은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태국 등에서의 조사‧발굴 활동을 통한 자료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작년 말 위안부 피해자 10인의 증언과 미국‧태국 현지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역사적 입증자료를 망라해 교차분석한 사례집(「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을 발표한 데 이어, 이번 영상물 자료까지 새롭게 발굴함에 따라 당시 일본군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를 보다 명확하게 증명해내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팀은 영상 속 인물들을 한국인 ‘위안부’로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 앞서 2000년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자신이라고 밝혔던 사진과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같다는 점을 제시했다.
또, 연구팀은 영상 속 한국인 위안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미‧중 연합군이 이후 포로 심문과정에서 생산한
송산에서 포로로 잡힌 ‘위안부’들은 이후 중국군이 쿤밍(곤명) 포로수용소로 데려갔다. 이때 작성된 쿤밍 포로 심문 보고서를 보면, 포로수용소에는 조선인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이 구속되었는데 조선인 가운데 10명은 송산 지역의 위안소에서 체포된 ‘위안부’들이었으며, 13명은 등충의 위안소에 있었던 ‘위안부’들이다.
이때 작성한 명부엔 한국 이름과 당시 나이, 고향이 기술되어 있다. 포로 명단 가운데 고(故) 박영심의 이름도 명확히 표기되어 있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지금까지 발굴한 문서, 증언, 사진, 영상 자료를 통해 ‘위안부’ 관련 연구와 외교적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한편, 시민참여 강연회 교육자료 등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콘텐츠 제작에도 활용할 예정이다.
아울러, 서울시는 오는 9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될 수 있도록 공모전, 학술대회, 전시 개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계획이다.
한편, 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영상을 촬영한 페이 병장이 일본군 위안소로 활용됐던 건물을 촬영한 영상도 함께 공개했다. 이 건물은 용릉(Lung-ling)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Grand Hotel, 중국어명은 미확인)이라 불리던 곳으로, 미‧중연합군이 용릉을 점령한 직후인 1944년 11월 4일 53초 길이로 촬영됐다.
이번 연구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강성현 교수(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는 “이 영상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은 후 2년 동안 관련 정보를 모으고 추적했고, 서울시의 지원과 연구팀 및 현지 연구원인 김한상 박사(Rice University)의 활약이 더해져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며 “자료를 일일이 찾고 열람해야 하는 과정이 한국에서 김서방을 찾는 일과 같아 쉽지는 않지만 더 늦기 전에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체계적 조사와 수집이 필요한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조사 발굴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시장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연구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갑자기 끊긴 상태에서 정부가 하지 않으면 서울시라도 지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대 연구팀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 오늘과 같은 결실을 얻게 됐다”며 “이러한 불행한 역사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자원을 집중해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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