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띄워서 박근혜 대세 차단
▲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 ||
사실 수도권 규제완화 논란은 정부의 경제위기 탈출구 정도의 정책적 의미를 넘어섰다는 게 정치권의 진단이다. 지난 10월 30일 환경부 등으로부터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보고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방 출신 의원들이 많은 친박그룹의 강한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이 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거침없이 대권을 향해 달리는 박근혜 전 대표의 힘을 빼려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이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반사이익을 불러와 지금까지의 일방독주 대권 구도에서 다자간 경쟁 구도로 바뀌는 전환점이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수도권 규제완화 조치에 담겨 있는 ‘대권 방정식’을 풀어봤다.
이번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 논란이 확산되면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단연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마땅한 대항마를 찾지 못한 이명박 대통령이 일단 김 지사의 손을 반쯤 들어준 것이다”라는 성급한 해석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최근 당내의 대권 구도가 급속하게 ‘박근혜 전 대표 대세론’으로 쏠린 것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짙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 친이세력 내부적으로 박 전 대표 대세론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나중에는 그것을 제어할 수단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오간 게 사실이다. 사실 김문수 지사의 경우 친이그룹에서는 ‘마이너급’ 대권주자로 분류되는 데다 당내 입지도 미약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친이그룹에서는 박 전 대표의 거침없는 대권 행보를 이대로 둘 경우 자칫하면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권력을 내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김문수 지사라도 최대한 띄워서 박 전 대표를 견제할 대항마로 일단 키워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온 결론이 수도권 규제완화 조치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김 지사에게 수도권 규제완화라는 문제는 차기 대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승부수임에는 틀림없다. 전임이었던 손학규 전 지사의 경우 일자리 100만 개 창출을 대권 프로젝트로 내걸었다. 하지만 각종 개발 규제에 묶여 있는 이상 수도권에 공장 증설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일자리 창출이라는 손 전 지사의 대권 프로젝트도 실패했다는 게 김 지사 측의 판단이다. 김 지사는 앉아서 당하고만 있던 손 전 지사의 실패를 보면서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는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끝까지 관철시켜야 공장 증설에 이어 경기 진작이 가능해진다고 봤다. 그는 도지사에 취임하자마자 수도권 규제완화 문제에 거의 ‘올인’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출범 초기 ‘선 지방발전-후 수도권 규제 완화’의 입장을 견지하자 김문수 지사는 융단폭격식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김 지사의 비난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 지방발전, 후 수도권 규제 완화’라는 입장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던 이 대통령의 입장이 지난 10월 30일 환경부 등의 보고를 받은 뒤부터 ‘갑자기’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경제적인 배경을 보자.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사실 최근의 국제 금융위기를 전혀 예견하지 못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돌발적인 대외 변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경기 진작책 수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수도권 규제완화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최근 ‘다소 혼란이 있더라도 수도권 규제완화 문제는 경제적 효율 측면에서 접근해 추진해나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지방 발전을 병행하면서 수도권 규제완화도 경기 진작을 위해 꼭 관철시켜 나갈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외 변수 때문에 수도권 규제 완화에 대한 이 대통령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친박그룹의 대표 주자인 김무성 의원은 최근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과 관련해 “모든 국가 주요 정책은 정무적 판단과 고민을 심각하게 해서 나와야 하는데 그러질 못 했다. 청와대에 홍보를 담당하는 수석을 만들어 놓았는데 중요한 정책이 스크린돼서 나와야 하지만 펑크가 났다”며 청와대의 ‘정무기능’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적이 있다. 과연 청와대가 수도권 규제완화를 시행함에 있어 지방 출신 의원들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아무런 정무적 판단 없이 밀어붙였을까. 특히 이 문제는 수도권과 지방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인데 그리 쉽게 추진했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 김문수 경기도지사. | ||
수도권 규제완화 논란은 김무성 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청와대가 정무적 판단에 대해 ‘펑크’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문제를 정교한 정무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청와대가 그리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규제완화 논란을 통해 청와대의 두 가지 노림수를 읽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박근혜 일방독주식의 대권 구도를 김문수 지사가 가세한 다자간 경쟁 구도로 만들어 대권주자 관리가 좀 더 용이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수도권 규제완화 논란은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스탠스를 압박하는 효과도 있다. 먼저 박 전 대표는 그동안 계속 국가적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자세에서 벗어나 이번 논란과 관련해서는 신속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계속 표출하고 나선 바 있다. 박 전 대표는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즉각적으로 “선후가 바뀌었다”며 이명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이때만 해도 대구 달성이 지역구인 그의 정치적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흘 뒤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존 입장과 조금 뉘앙스 차이가 있었다. 박 전 대표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수도권과 지방이 같이 발전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서로 어떻게 해야 잘살게 하는가가 포인트고 자꾸 싸우는 식으로 비쳐지는 것은 곤란하다. 공동발전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방발전이 우선이고 수도권 규제완화는 후순위라는 기존 입장에서 약간 비켜나 ‘지방-수도권 공동발전론’을 제기한 것이다.
박 전 대표 측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문제는 정책적 비판으로 봐야 한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지적 아니냐”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처음에 “선후가 잘못됐다”라고 말한 것과 관련해 수도권 민심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박 전 대표가 국가지도자로서 대승적 차원에서 이번 문제를 바라봐야지 너무 지역구 이익에 몰두해 큰 그림을 못 본다”는 비판이 그것. 그 뒤 박 전 대표는 ‘공동발전론’을 제기하며 수도권 민심 이반 차단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지지 기반인 영남만이 아닌 국토 전체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특정지역에 편중됐다는 비판을 차단하겠다는 포석도 깔린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입장은 다소 옹색해졌다. 영남권 기반인 친박그룹을 생각하면 ‘선 지방발전 후 수도권 규제 완화’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만, 차기 대권과 관련해 최대의 표밭이자 국민 여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수도권 민심도 등한시 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공동발전론’이라는 타협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이번 수도권 규제완화 논란이 수도권과 지방 간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 돼버린 이상 박 전 대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박 전 대표로서는 그의 공동발전론이 ‘규제완화 찬성’ 쪽으로 해석될 경우 김문수 지사가 이끄는 당내 수도권 세력에 대권 주도권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솔로몬의 지혜를 빌려야 할 상황이다.
앞서의 박 전 대표 측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정치지도자로서 남다른 감이 있고 이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으니까 공개적인 발언을 한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 이 문제가 박 전 대표와 수도권을 갈라놓는 일종의 덫이 될 수도 있지만, 공동발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인 만큼 중요 사안에 대해 본인 비전을 제시한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문제가 수도권-지방 간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으면서 죽기살기식 경쟁이 될 경우 차라리 수도권 대책을 원점부터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럴 경우 정책 결정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타격이 클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차기 대권을 넘보는 박 전 대표로서도 수도권 민심의 이반을 부르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규제완화 문제는 박 전 대표를 딜레마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김문수 지사는 규제완화가 관철되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챙길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권의 대권주자 반열에 반쯤은 올랐다는 점에서 밑지는 장사는 아닌 듯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