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두에게 9번 내주고 ‘1+8번’
▲ 이반 사모라노 | ||
오늘날 등번호는 선수들 본인이 원하는 번호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 어떤 선수들은 어떤 미신이나 징크스에 따라 번호를 선택하는가 하면 또 어떤 선수들은 다분히 개인적인 이유로 특정 번호를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처음부터 등번호가 자유롭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축구 경기에 처음으로 등번호가 도입되었던 것은 1934년이었다. 당시 축구선수의 등번호가 갖는 의미는 그저 선수들의 포지션을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번호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11명의 축구선수들을 그라운드 위에서 보다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1~11번까지 일련의 번호를 매겼던 것이다.
가령 골키퍼에게는 1번이, 우측과 좌측 수비수에게는 각각 2번과 3번이, 그리고 나머지 수비수에게는 차례로 4, 5번이 주어졌다. 공격수의 번호는 10, 11번이었으며, 주전이 바뀔 때마다 역시 선수들의 등번호도 바뀌었다.
이렇게 포지션에 따라 획일적으로 사용되던 등번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은 1974년 서독 월드컵 때부터였다. 당시 네덜란드팀은 이례적으로 선수들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등번호를 매겼다. 따라서 얀 용블뢰드는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1번 대신 8번을 달고 뛰었으며, 다른 선수들도 포지션과 상관 없이 이름 순서에 따라 등번호를 배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1번을 배정받았던 스타 플레이어 요한 크루이프가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신의 행운의 번호이자 이미 소속팀에서 고유번호로 각인되어 온 ‘14번’을 고수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크루이프의 반발로 하는 수 없이 네덜란드 대표팀은 그에게 14번을 달도록 허용했다. 최초로 선수가 직접 등번호를 선택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런 까닭에 네덜란드와 경기를 가진 상대팀들은 처음 접하는 등번호에 경기마다 혼란을 겪어야 했고, 이런 덕분인지 네덜란드는 당시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할 수 있었다.
그때와 달리 이제는 등번호와 축구 선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됐다. 많은 축구팬들이 축구 선수와 함께 그의 등번호를 기억하는가 하면 많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의 등번호를 물려 받는 일도 흔한 일이 됐다. 이렇다 보니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등번호 속에 숨어있는 선수들의 개인적인 비밀도 생기게 마련. 이처럼 축구 선수들의 등번호에는 재미있는 사연들이 많이 얽혀있다.
빅상테 리자라쥐 69
1998년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프랑스 전 대표팀 수비수인 리자라쥐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선택한 번호는 ‘69번’.
이유는 간단하다. 1969년 출생인데다가 키도 169㎝, 몸무게도 69kg이기 때문이었던 것. 69번과 인연이 깊은 까닭에 그에게 69는 항상 행운의 번호다.
▲ (왼쪽부터) 베니 매카시, 데이비드 베컴, 아메드 호삼 미도 | ||
이번 월드컵의 야신상 후보이자 골키퍼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부폰의 등번호는 한때 88번이었다. 다소 독특한 이 번호는 사실 이탈리아의 속담인 “강한 남자는 네 개의 알을 갖는다”는 데서 따온 것이다. 88이라는 숫자가 마치 네 개의 둥그런 알을 나열해 놓은 듯 보이기 때문.
하지만 현재 그는 88번 대신 골키퍼 고유의 번호인 1번을 사용하고 있다.
아메드 호삼 미도 99
이집트 출신인 그는 AC 밀란 소속 당시 축구 선수가 가질 수 있는 번호로는 가장 높은 99번을 달았다. 지난 2004년 AS 로마로 이적할 당시 이미 빈첸초 몬텔라가 9번을 사용하고 있었던 까닭에 어쩔 수 없이 택한 번호가 바로 9를 한 번 더 붙인 99였던 것. 하지만 현재 토트넘 홋스퍼에서 뛰고 있는 그는 다시 9번을 사용하고 있다.
데이비드 베컴 23
베컴하면 떠오르는 등번호는 단연 7번.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그의 등에 새겨진 7번은 트레이드 마크로 각인된 지 오래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 당시에도 늘 7번을 사용했던 그가 현재 소속팀인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23번을 달고 뛰고 있다. 사정인즉슨 이적 당시 이미 스페인 최고의 공격수인 라울이 7번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이에 하는 수 없이 택한 번호가 23번이었다.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가 23번이기 때문이라고.
베니 매카시 77
남아공출신 포워드인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번호는 럭키 세븐인 7번. 하지만 스페인 셀타 비고에서 포르투갈의 FC 포르투로 이적할 당시에는 이미 7번을 사용하고 있는 선수가 있었기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7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하는 수 없이 그는 7을 하나 더 붙인 77번을 택했다.
이반 사모라노 1+8
스타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등번호를 내주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선수가 바로 사모라노(칠레·2003년 은퇴)다. 인터 밀란에서 오랫동안 9번을 사용하고 있던 사모라노는 호나우두의 갑작스런 입단(현재는 레알 마드리드)으로 9번을 내주어야 했다. 자존심이 상했던 그는 묘안을 하나 생각해냈다. 바로 1+8번이라는 기막힌 등번호를 생각해낸 것. 그의 기발한 위트가 놀라울 따름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