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조력자 최씨는 범행 모르고 가담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 6월 26일 낮 12시 25분쯤이었다. 도쿄 중심부인 시부야구의 한 버스정류장 인근 대로변.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이케다 가나코 씨(여·21)가 괴한 2명에게 끌려 왜건차에 실려 사라졌다.
2분 뒤인 12시 27분. 가나코 씨의 어머니인 이케다 유코 씨(47)의 휴대폰이 울렸다. 딸인 가나코 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동차에 강제로 태워졌다”는 것. 곧이어 남자가 전화를 바꿨다. “유코, 모든 것은 당신이 하기 나름입니다”라는 협박전화였다. 29분 뒤인 12시 56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해 봤나요.”(납치범)
“지금 준비할 수 있는 돈은 400만~500만 엔 정도입니다.”(유코 씨)
“딸의 몸값이 겨우 그 정도입니까.”(납치범)
“그럼 얼마를 원하나요.”(유코 씨)
“3억 엔.”(납치범)
이후 세 차례 더 전화가 걸려왔고 몸값 흥정이 본격화됐다. 통화는 한결같이 가나코 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했다.
일본 경시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납치 현장을 목격한 회사원(29)의 신고에 이어 유코 씨가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경찰은 오후 4시 5분쯤 전화 발신기록을 토대로 범인들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의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도쿄 인근 가와사키 시내를 이동하다 특정 지역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최초 신고자가 얘기한 납치 차량번호를 수배했고 이윽고 차량을 발견,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는 차량에 탄 남성들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가와사키시 나카하라구의 한 맨션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납치범들과 유코 씨와의 전화는 이 과정에서도 계속돼 밤 11시 10분까지 총 14차례나 이뤄졌다.
그리고 새벽 0시 42분 경찰은 가와사키 역 부근에서 용의자 2명을 체포한 데 이어 1시 25분 가나코 씨가 감금된 맨션을 급습, 총을 쏘고 저항하는 또 다른 용의자 1명을 체포하고 가나코 씨를 구출했다.
사건 발생에서 해결까지 정확히 13시간이 걸린 단막극이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우선 유코 씨 모녀가 일본에서 화려한 삶을 살아온 유명인사라는 점 때문이다.
유코 씨 모녀의 거주지는 도쿄의 고급주택가인 시부야구 다이칸야마. 3층짜리 호화저택으로 시가가 3억 2000만 엔(약 30억 원)에 이른다. 주차장에는 모녀가 각각 타고 다니는 5000만 엔짜리 롤스로이스와 2200만 엔짜리 페라리가 놓여있다. 한켠에는 가나코 씨가 운전면허 취득 직후 선물로 받았다는 700만 엔짜리 벤츠도 있다.
치장도 초일류다. 한 철 옷값에만 400만 엔을 투자할 정도다. 물론 최고급 명품이다. 애완용 고양이의 목에 300만 엔짜리 루비와 진주 목걸이를 달아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신문, 잡지, TV 등에도 자주 등장했고 세간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 5월에는 페트 전문지에 모녀가 우아하게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
물론 유코 씨 모녀가 처음부터 이처럼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유코 씨는 유리회사 경영자 2세와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홀로 가나코 씨를 키우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 30세 때 교린대 의대에 진학했다. 졸업 뒤에는 대형 클리닉에 근무하면서 8000여 건의 성형 수술을 시행했다. 2002년 시부야에 ‘이케다 유코 클리닉’을 개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방흡입, 가슴수술이 전공으로 통상 몇 시간씩 걸리는 수술을 한 시간 만에 끝내 큰 인기를 끌었다. 수술 한 번에 통상 100만 엔이어서 ‘시급(時給) 100만 엔짜리’ 의사라는 평판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혼 뒤 홀로 키운 외동딸인 만큼 가나코 씨에 대한 사랑도 유별났다. 실제로 유코 씨는 학생인 가나코 씨에게 화장품 판매회사를 세워준 뒤 대표직을 맡기기도 했다. 가나코 씨도 대학에서 스키동호회에 가입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공주님’이라는 얘기도 들을 정도라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그런데 이 납치극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관심을 모으게 하는 것은 바로 범인 중의 한 명이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다른 공범 2명은 일본인과 중국인이었다. 동북아 3국인으로 이뤄진 다국적 범죄단을 조직한 셈이다. 이번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인물은 각각 한국 국적의 최기호(54), 중국 국적의 이용(29), 일본 국적의 이토 가네오(49) 등 3명이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용 씨는 중국 지린성 출신으로 2003년 1년짜리 유학비자로 일본에 온 뒤 눌러 앉아 현재는 불법 체류자인 상태다. 이토 씨는 일본 최고의 폭력단인 ‘야마구치구미’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트럭 운전을 하다 16년 전 대형사고를 낸 뒤 직업을 잃고 부인과도 이혼한 상태다.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최 씨는 재일교포로 특별영주자격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다. 요코하마에 거주지를 두고 4~5년 전까지만 해도 배관 공사나 전기 배선 등의 일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집과 연락을 끊은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3명 중 주범은 중국인 이용 씨로 밝혀졌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수개월 전에 TV에 나온 모녀를 보고 돈이 있을 것 같아 범행을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작업 실행을 위해 3년 전에 술집에서 알게 된 이토 씨에게 접근했고, 이토 씨가 최 씨를 끌어들였다. 3명의 역할은 이용 씨가 유코 씨와의 협상을 맡고 이토 씨가 가나코 씨의 감금을, 최 씨는 렌터카 조달 및 운전을 맡았다.
이용 씨와 이토 씨는 지난 4월 시즈오카현의 이즈노구니시에서 발생한 파친코 강도사건에도 연관돼 있어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돼 있는 등 일본에서는 이미 ‘전과’를 가진 상태다.
다만 최 씨는 범행 직전까지도 납치극에 가담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범행 당일 렌터카를 빌리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담긴 증명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납치극을 사전에 알았으면 순진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렌터카를 빌렸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도 “이토 씨와는 3년여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이용 씨와는 사건 당일 처음 만났다”고 진술했다.
일본 경찰은 지난달 27, 28일 현장 검증을 벌였으며 조만간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박용채 재일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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