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 ‘나는 아니다’ 폭탄 돌리기 속 긴장
전주지검이 지난 8월 2일 전북 재량사업비 관련 전북도의회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역 정치권의 관심은 재량사업비 비리 수사가 권력형 비리로 확대될까 하는 점이다. 검찰의 초기 수사는 브로커 A 씨의 단순 비리에 집중됐다. A 씨는 2012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재량사업비 관련 사업을 수주해 주겠다”면서 의료용 온열기, 배관설비, 태양광시설 등 업체 3곳으로부터 2억 5000여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조사 결과, A 씨는 업자들에게 “재량사업비 관련 사업을 수주해 줄 테니 매출액의 40%를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 검찰 칼끝 어디까지
그러나 검찰의 지방의원 재량사업비 수사에 ‘입을 연 브로커’와 ‘제3의 브로커’라는 스모킹건이 떠오르면서 검찰 수사의 칼끝이 지역정치권으로 급선회하는 양상이다. 현재까지 검찰은 전·현직 전북도의원 2명과 브로커 2명을 구속했다. 7개월에 걸쳐 수사력을 집중한 것 치고는 성과가 크지 않았지만 브로커 A 씨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검찰은 지역 정치계에서 ‘화려한 인맥’을 자랑해온 A 씨가 도의원들에게 금품을 뿌리는 등 로비를 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실제 그가 평소 현직 국회의원, 도의원 등의 친분을 과시했으며 일감 수주를 자신하거나 위세를 부린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검찰이 제3의 브로커의 신병을 확보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수사선상에 거론되는 지방의원 수도 크게 늘고 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지난달 19일 구속된 전북지역 한 인터넷 매체 대표 A 씨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혐의에 대한 일부 진술을 했다. A 씨는 구속 이후 신경의 변화를 일으켜 재량사업비 리베이트와 관련된 전북지역 유력 지방의원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혐의 일부를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A 씨의 긴 침묵에 속앓이를 하던 검찰이 다양한 수사기법을 통해 지방의원으로 향하는 물꼬를 튼 것으로 보인다.
구속된 두 명의 브로커 외에 제3의 브로커 이름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한때 유력 지방의원이기도 했던 B 씨는 의원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재량사업비 브로커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B 씨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진행한 가운데 추가 소환조사와 함께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져 구속영장 청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A 씨와 B 씨 등 브로커에 대한 검찰 수사가 깊이를 더하면서 거론되는 지방의원 실명도 7~8명에 달하는 등 크게 수를 불려가고 있다.
일부 지방의원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이는 검찰 수사의 초점은 이제 ‘종착지’를 향하고 있는 모양새다. 검찰은 내주 초까지는 수사를 일괄 매듭짓겠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현재 구속된 A 씨와 또 다른 2~3명의 업자를 상대로 도의원들의 개입 여부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앞서 검찰은 지난 6월 2일 전북도의회 한 전문위원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전방위로 수사를 확대해 왔다. 전주지검 관계자는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늦어도 다음 주 초에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혀 검찰수사가 끝을 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 권력형 비리로 비화되나
관심사 중 하나는 권력형 비리로 비화될지 여부다. 검찰청 안팎에서 전·현직 도의원 연관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 혐의를 부인하던 A 씨의 입에서 몇몇 전·현직 의원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면서 사법처리 규모는 더욱 늘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A 씨가 본격적으로 ‘봉인’을 푸는 순간 재량사업비 비리를 둘러싼 의혹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역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 사건 본질을 A 씨 개인의 단순한 변호사법 위반 사건이 아니라 지역 정가 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권력형 비리로 보고 있다. 검찰이 A 씨를 상대로 한 조사에서 전·현직 지방의원들과 직접 연결되는 진술과 물증을 확보할 경우 수사는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수사가 자신들을 향하면서 전북도의원들은 행여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며 모두 “나는 아니다. 다른 의원인 것으로 안다”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다. 한 전직 도의원은 “실제로 업자들이 찾아와 리베이트 10%를 제안하며 공사를 요구해 왔다”며 “상당수 의원들이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전, 현직 의원들 사이에서는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A 씨가 검찰 조사에서 거론한 것으로 전해진 한 전북도의원은 “사실대로 밝혀질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또 다른 전북도의원도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면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제3의 또 다른 한 의원은 혐의점이 약해 일단 검찰 수사선상에서 비켜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전주지검은 2일 A 씨가 거론한 2명의 전북도의원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이들 의원의 혐의점을 밝히는데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은 이날 오전 의원들 사무실에서 수사관을 급파해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관련 서류 등을 확보했다. 검찰은 압수물 분석이 끝나는 대로 해당 의원들에 대한 조사를 벌인 뒤 신병처리 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또 이날 압수수색을 벌인 2명 외에 최소 3명 이상 광역·기초의원을 수사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북도의회는 이날 검찰 압수수색으로 지난해 12월 재량사업비 수사가 시작된 이후 3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하는 굴욕을 안게 됐다. 그동안 의원 개인 비리 수사로 전북도의회가 압수수색을 당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재량사업비 수사 한 건으로 3차례나 압수 수색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면에 검찰 안팎에선 이들 2명 외에 대형 게이트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검찰이 무려 7개월에 걸친 ‘대장정’ 끝에 브로커들로부터 짜고 짜내서 얻어진 결과가 두 의원에 대한 혐의 포착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량사업비 수사는 결과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정가에 지각 변동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도마 위에 오른 ‘재량사업비’
‘재량사업비(주민 숙원사업비)’는 의원들이 지역구나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선심성 예산’을 말한다. 의원들이 지역구나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 민원 사업을 해결해주는 기능도 있지만, 집행과정에서 특정업체가 사업을 맡고 의원들은 리베이트를 챙기는 등의 문제점이 수년전부터 지적돼 왔다.
공식적으로 재량사업비 명목의 예산은 없지만 전북도의회의 경우 의원 38명이 1년 동안 임의로 쓸 수 있는 예산은 190억 원가량으로, 의원 1인당 5억 5000만 원 정도이다. 이 가운데 도청 예산은 4억 5000만 원, 도교육청 예산은 1억 원 등이다. 일선 시·군의원의 경우 해당 자치단체 상황에 따라 1억~3억 원가량이 배정되고 있다는 것이 전·현직 지방의원들의 얘기다. 이 같은 재량사업비 외에도 의원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억대 ‘쪽지 예산’이 덤으로 편성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윤중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