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인간 젓가락’ 죽음의 무대로…
▲ 건강해 보이는 고교 시절 모습. 오른쪽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촬영했던 사진. | ||
최근 브라질에서 한 여성 모델이 거식증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한창 주가를 올리면서 떠오르던 아나 카롤리나 레스톤(21)이 바로 그 주인공. 사망 당시 그녀의 신체 사이즈는 174㎝의 키에 몸무게는 고작 40㎏에 불과했다. 생전에 여느 모델들처럼 몸무게에 집착했던 그녀는 사과, 토마토 등만 먹었으며, 그마저도 매번 토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살 빼는 약도 복용했던 그녀는 결국 거식증을 앓다가 신장기능 저하, 고혈압, 호흡곤란 등의 증세로 지난 11월 14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레스톤이 거식증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자 패션계에서는 뒤늦게나마 ‘말라깽이 모델을 퇴출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 브라질을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뉴욕 등지에서는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이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
지난해 거식증으로 사망한 여성은 비단 레스톤뿐만이 아니었다. 그후 브라질에서만 무려 다섯 명의 20대 여성이 거식증 증상을 보이다가 숨을 거두었으며, 심지어 올해 초에는 한 14세 소녀가 거식증에 따른 심장마비 증세로 사망했다. 당시 소녀는 170㎝의 키에 38㎏의 몸무게였다.
이처럼 브라질에서만 유독 거식증으로 사망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것은 모델에 대한 환상과 집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다. 슈퍼모델인 지젤 번천과 같은 ‘글로벌 스타’가 탄생하면서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는 어느덧 모델이 ‘꿈의 직업’으로 자리잡았으며,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경우도 많아졌다.
물론 문제는 슈퍼모델이 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패션계가 요구하는 비정상적인 몸매 기준과 모델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다.
모델들이 에이전시로부터 듣는 핀잔은 끝이 없다. “넌 너무 뚱뚱해” “살이 좀 찐 것 같으니 당장 빼라” “너무 키가 작아서 안돼” 등 끊임없이 외모에 집착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 또한 몇몇 에이전시들은 “단 며칠 안에 몇 ㎏을 빼라”는 등 구체적인 선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모델들 사이에서 ‘다이어트’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저칼로리 식단을 짜는 것은 기본, 심한 경우에는 아예 며칠을 굶거나 살 빼는 알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해지면 레스톤처럼 거식증을 앓게 된다. 거식증 환자들은 주로 극단적인 방법으로 살을 빼곤 하는데 문제는 이들 스스로가 거식증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거식증 환자의 20%가 자살, 심장마비,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4분의 3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질의 한 거식증 모임 사이트는 이러한 거식증 환자들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회원들은 늘 다음과 같은 기도문 비슷한 구절을 되뇌이곤 한다. 가령 “먹을 때에는 죄책감을 가져라” “먹은 후에는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라”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먹은 후 토해내기 가장 좋은 음식들을 소개하는가 하면 각종 살 빼는 알약에 관한 정보도 교환하고 있다. 이 중에는 천식 환자들이 복용하는 기관지 확장제인 ‘클렌부테롤’이나 미국에서는 금지된 마황과 같은 위험한 약품도 포함되어 있다.
거식증으로 사망한 모델 레스톤 역시 이런 환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과도한 다이어트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 무렵부터. 처음 모델로 데뷔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16세 때만 해도 그녀는 건강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키가 더 자라도록 9개월 동안 성장 호르몬 알약을 먹기도 했지만 늘 50㎏가량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 때 처음 홍콩으로 진출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맥도날드를 드나드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누렸다. 이내 52㎏까지 살이 찐 그녀는 에이전시로부터 “너무 뚱뚱하다” “팔뚝 살이 처진다”는 등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런 핀잔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그녀는 하지만 자신에게 들어오는 일이 줄어들자 자연히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47㎏까지 감량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녀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사과와 토마토만 먹으면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으며, 밤중에 일어나서는 샤워기를 틀고 몰래 그날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내곤 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급기야 식욕억제제로 알려진 각성제의 일종인 암페타민도 복용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설사약도 함께 먹었다.
그렇게 점차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다이어트에 매진하길 수개월째. 결국 지난해 일본에서 화보 촬영을 준비하던 중 구토와 함께 각혈을 하면서 돌연 쓰러졌다. 당시 그녀의 몸무게는 42㎏.
그녀는 즉시 응급실로 실려갔으며, 진단 결과 심각한 거식증으로 판명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미 더 이상 손가락만으로 구토를 유발할 수 없자 세제를 푼 물에 소금을 섞어 마시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다시 고향인 브라질로 돌아온 그녀는 모델을 포기하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모처럼 다시 살도 찌우기 시작했으며, 건강도 호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패션계의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그녀는 결국 다시 모델일을 시작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모델로서 점차 성공가도를 달릴수록 그녀의 건강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장 기능의 이상으로 통증이 빈번해졌는가 하면 진통제를 10알씩 먹는 날도 허다했다. 배를 끌어안고 바닥에 뒹구는 일도 많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17일. 그녀는 생애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4일 후 심각한 신장의 통증과 호흡곤란 등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실려간 그녀는 신장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즉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그 후 3주 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현재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모델들의 체질량지수(BMI)가 정상인 18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모델들의 건강진단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또한 모델의 연령을 16세 이상으로 제한하거나 175㎝의 모델의 경우 몸무게가 최소 55㎏은 되야 한다는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이런 규정이 앞으로 패션계에서 ‘마른 몸매’를 추방하는 데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 하지만 패션계 인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