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인해전술’문턱서 ‘우지끈’
▲ 위험… 3일 오후 강제해산에 나선 국회 경위들과 야당 당직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급히 피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이런 점에서 보면 현재의 경색 정국에 대한 일부 개인의 ‘책임론’은 무의미하다. 다만 172석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무기력한 정국 운영은 객관적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현 지도부의 협상력에 갈수록 의문을 표시하며 불신하고 있다. 여당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여권 ‘법안 전쟁’의 막후를 들여다봤다.
최근의 법안 전쟁을 보면 지난해 초 그 어떤 정권보다 ‘막강하게’ 출발했던 한나라당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치권에선 이번 법안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나더라도 ‘한나라당의 완패’로 끝날 것이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이러한 예상은 현재 법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여권과 국회의장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경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청와대는 오락가락하는 여당 지도부를 향해 혀만 찰 뿐이며, 엇박자로 전력 약화를 초래하고 있는 박희태 대표와 홍준표 원내대표는 김형오 국회의장의 의사봉만 쳐다볼 뿐이고, 타협의 대명사를 자처하는 김형오 의장은 여야 지도부의 ‘배째라 식’ 협상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쳐다볼 뿐이다. 여당과 국회의장 간의 이런 갈등 분위기에 더해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번 법안 전쟁이 초선들의 ‘소심(小心)’, 홍준표 대표의 ‘사심’, 김형오 의장의 ‘복심’ 때문에 더욱 꼬이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여당 일각과 의장의 ‘삼심’(三心) 행보 때문에 야당과의 법안 전쟁에서 완패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먼저 이번 법안 전쟁에서 드러난 초선들의 소심 행보는 현재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고 동시에 미래를 담보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뼈아프다. 사실 법안 전쟁을 지켜보는 한나라당의 초선 의원들은 하나같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현재의 경색 정국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의총에서 진성호 의원이 “전기와 물을 끊어버리라”고 극단적인 발언을 쏟아내긴 했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은 일단 숨을 죽이고 지도부의 협상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초선 의원들의 이러한 ‘소심’ 행보에 대해 한나라당 안팎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16~17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의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돼 ‘미래연대’나 ‘수요모임’을 만들어 초선들의 의사를 비교적 뚜렷이 표명했고, 그것이 지도부에도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한 바 있다. 특히 당시 초선들 목소리가 힘을 얻었던 이유는 그들이 주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계파에 연연해하지 않았던 탓에 당 지도부도 그들의 주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대 국회 들어, 특히 최근의 경색 국면에서 한나라당 91명 초선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해답은 바로 지난 총선 공천과정에 형성된 계파라는 줄에 자신들의 목이 옥죄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직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번 18대 초선 의원들은 대부분 개인의 정치적 능력보다는 정권 실세들에게 줄을 잘 대 공천을 받아 당선된 사람들이다. 지난 17대만 하더라도 한나라당은 탄핵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파보다는 인물 위주의 비교적 공정한 공천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선 승리에 취했던 일부 정권 실세들이 ‘사천’을 하는 바람에 초선들이 대부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이런 ‘상하 관계’ 때문에 초선들이 촛불 정국에서도 날 선 성명 하나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태생적 한계가 이번 법안 전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뿐이다. 누가 대놓고 지도부의 협상력을 비난한 적이 있었나. 그들이 요즘 ‘애늙은이 초선’, ‘웰빙 초선’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초선들의 계파에 얽힌 ‘소심’ 행보는 대야 협상을 하는 지도부에도 안일한 자세를 부추기는 악순환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홍준표 원내대표의 ‘사심’ 행보도 이번 협상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홍 대표는 “위, 아래에서 너무 압박한다”라며 협상 타결 추인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홍 대표가 이번 법안 전쟁을 통해 ‘뜨고’ 싶은 나머지 야당에 많이 양보해버렸다”라는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다. “너무 자기 장사(정치 위상 강화)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홍 대표는 지난 1월 2일 여야 교섭단체 원내대표 최종협상에 앞서 최고위원들에게 민주당과의 의견접근을 본 가(假)합의안을 보고했으나, 강한 반대와 불만에 직면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홍 대표의 가안은 의총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협상안이다. 이렇게 할 것이면 뭐 하러 지금까지 기다렸는가. 차라리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그 뒤에 욕을 먹는 게 정치적 실리는 더 많이 챙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 대표가 보고를 한 뒤 혼쭐이 날 정도로 분위기도 험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홍 원내대표는 보고 후 기자들에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회담에 가기 전 최고위원들에게 가합의안을 보였는데 다들 반응이 격하다. 이 안대로는 할 수 없다는 게 전원 의견이므로 거부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번 협상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계속 보였던 홍 대표에 대해 “애초부터 친이그룹에서는 홍 대표가 이번 협상에서 너무 욕심을 내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자신의 입각 등을 염두에 둔 나머지 야당에 너무 양보해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 장사를 하다 보니 청와대의 요구도, 당의 요구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돼 있는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청와대도 홍 대표가 민주당과 합의한 가합의한 내용을 전해들은 뒤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면서도 불만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 연설 이전에 법안을 처리하지도 못한 데다, “야당에 다 내줬다”라는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결국 홍 대표는 자신이 의욕적으로 내놓은 가합의안이 당 최고위원회와 청와대 모두에게 비토를 당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고,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홍 대표는 그뒤 일본 전국시대의 3대 다이묘(大名·영주)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론하며 “새가 울지 않을 때 오다는 죽인다고 했고, 도요토미는 울게 만든다고 했고,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앞으로는 도쿠가와 식으로 야당과 협상하겠다. (본회의장이) 비면 들어가지만 빌 때까지 기다린다”며 장기전에 돌입했음을 밝혔다. 홍 대표는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 기다릴 때까지 기다려준 뒤 우리의 뜻대로 법안을 통과시키자”라는 한 최고위원의 의중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그가 이번 협상에서 행사할 수 있는 ‘재량권’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야의 법안 전쟁은 사실 김형오 국회의장의 ‘복심’(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 골자는 그가 국회의장 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나라당의 대표나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이번 법안 전쟁에서 최대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한 뒤 나중에 할 수 없이 직권상정을 하는 쪽으로 전략을 짰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의장 측은 “너무 앞서나간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그를 국회의장으로 밀어준 친이그룹에서는 “만약 김 의장이 나중에 다시 당 대표를 맡을 의사가 있다면 왜 진작 한나라당 요구대로 직권상정을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그의 오락가락 행보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친이그룹에서는 이번 김 의장의 행보를 보면서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위치지만, 한나라당 출신인 만큼 절박한 순간에는 ‘친정’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누구 덕에 국회의장이 됐는데…”라는 원망도 나온다.
▲ 홍준표 원내대표(왼쪽), 김형오 국회의장 | ||
그런데 김 의장의 입장을 이해하는 측에선 그가 ‘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가 가진 정치적 지향점 때문에 타협의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친이-친박 사이에서 당내 계파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자평을 한 바 있다. 또한 자신이 이번 18대 국회에 의장으로 부임할 때 내건 ‘상생국회’란 기치를 깨고 직권상정을 강행하는 데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한나라당 친이그룹은 김 의장의 정치적 소신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친이그룹 일각에서는 “도대체 민주당을 몰라서 또 속느냐”, “진짜 김형오 스타일을 이제야 알았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는 그가 5선을 하면서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왔던 “김형오가 맡으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라는 비판과 직결된다. 본능적으로 갈등을 싫어하는 김 의장의 정치적 스타일 때문에 이번 법안 전쟁이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닌’ 이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강경파들은 김 의장을 향해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낫다. 일찍 결단하고 일찍 수습하는 게 의장으로서 현명한 길”이라며 그를 압박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번 법안 전쟁을 통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계파 정치의 희생양이 된 초선들의 ‘소심’과 자신의 정치적 안전판을 확보하기 급급한 홍준표 대표의 ‘사심’이 더해져 172석 거대 여당은 서서히 쓰러져가는 공룡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김형오 의장의 ‘복심’은 치킨게임을 앞두고 있는 법안 전쟁 드라마의 조연쯤에 해당된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