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단숨에 사로잡은 떠오르는 ‘검은 샛별’
▲ 배럭 오바마. 로이터/뉴시스 | ||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꿈꾸는 배럭 오바마 일리노이주 상원의원(46)의 열풍이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고 있다. 지난 16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오바마는 이로써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59)과 함께 민주당의 양강 구도를 이루게 됐다. ‘검은 샛별’ ‘흑색 돌풍’ ‘흑인 클린턴’ 등 그를 나타내는 수많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미국 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여론 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던 힐러리도 이런 갑작스런 ‘돌풍’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미국이 과연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택할 것인가 하는 흥미로운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됐다.
“극도로 양분화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낙관과 희망의 정치를 하겠다.”
정계 입문 3년 차인 신참 오바마는 대권에 도전하는 자신의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흑백 갈등과 소수 인종 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미국 사회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권에 도전하는 흑인은 그가 처음은 아니다. 1972년 미국 최초의 흑인 의원 셜리 치솜이 가장 먼저 도전한 바 있으며, 그후로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1984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민주당 경선에 나갔다가 실패했던 적이 있다. 또한 지난 2004년에는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가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 내에서 ‘흑인 대통령’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무도 승리를 점치지 않았을 뿐더러 사회 전반적으로 ‘분위기’나 ‘때’도 조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미국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흑인 대통령이 나올 때도 됐다’는 여론이 조심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오바마 의원의 지지율과 인기를 고려해 본다면 미국인들의 의식은 분명히 많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오바마의 어떤 점이 미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걸까.
그가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2004년 대선 때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깜짝 기조 연설로 인기를 얻으면서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선거에서 그는 70%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현재 그는 미 의회에서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자 역대 다섯 번째 흑인 상원의원이기도 하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젊음’과 ‘신선함’에 있다.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 그리고 기존의 정치에 염증이 난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신선한 매력’은 그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무기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환갑에 가까운 힐러리나 60~70대인 다른 후보들에 비해 젊고 패기가 넘친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시대는 갔다.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적절한 유머를 섞어 청중을 휘어잡는 그만의 타고난 연설 솜씨 역시 인기몰이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흑인 클린턴’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
이에 비해 그의 정치 경력이 짧다는 점, 구체적인 정치적 성과들이 부족하다는 점 등은 그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넘어야 할 고비다. 이에 대해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대통령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라면서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보다 그가 넘어야 할 더 높은 산은 어쩌면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과연 미국인들이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정말 되어있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 최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흑인 대통령’보다는 ‘여성 대통령’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조사됐다.
▲ 오바마의 가족들(위). 가족적이며 스캔들이 없는 그는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아래는 그가 1995년 케냐 여행에서 만난 계조모와 함께. | ||
이보다 앞서 발간된 첫 번째 회고록 <아버지로부터 받은 꿈들(Dreams From My Father)> 역시 그의 유명세에 따라 최근 들어 뒤늦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1995년 출간된 이 책은 지금까지 80만 부가 팔리면서 서점가의 ‘오바마 돌풍’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CD 여섯 장에 담아 출간한 오디오북은 지난해 그래미상 부문 ‘최고의 낭독 앨범’을 수상하면서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자서전 <마이 라이프> 오디오북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 책에는 자라온 성장 과정과 함께 어릴 적 인종차별로 겪었던 고통,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느낀 솔직한 심경 등이 적혀 있다. 또한 이 책은 그가 정치에 뛰어들기 전에 출간했다는 점에서 ‘정치인 오바마’가 아닌 ‘평범한 흑인 청년 오바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아버지는 어릴 때 염소를 치던 목동이었지만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았으며, 하와이로 유학까지 왔다. 당시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오바마가 두 살 되던 해 어머니와 이혼했다.
당시 아버지는 하버드대에 진학했지만 결국 고향인 케냐로 돌아갔으며, 그후로 오바마는 아버지를 단 한 번밖에 볼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중산층 가정의 백인사회에서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던 오바마는 “늘 백인의 규칙에 따른 백인 법정에 서야 했지만 나에겐 아무 힘이 없었다”면서 인종차별로 얼룩졌던 유년 시절에 대해 털어 놓았다.
여섯 살 때 어머니는 무슬림인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재혼을 했다. 새 아버지를 따라 잠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했던 오바마는 그곳에서 ‘무슬림 초등학교’를 다녔다.
▲ 힐러리 클린턴(왼쪽), 회고록 <희망의 대담함> | ||
이런 까닭에서인지 그는 고교 시절 마약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책에서 그는 “마약 중독자, 마리화나 상용자.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너무 취해 있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솔직대범하게 적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콜롬비아 대학에서 정치과학을 전공했던 그는 1982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접하게 됐다. 살면서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던 아버지였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아프리카인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핏줄이자 뿌리였다.
후에 그는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있던 까닭에 아프리카에만 여러 명의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1985년 시카고로 이주해서 비영리 단체에 몸담으면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바로 미국 최고의 명문이라는 하버드대 진학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그는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법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자신의 조상들이 살고 있는 케냐를 찾은 오바마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199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92년 변호사 사무실에서 알게 된 흑인 여변호사 미셸 로빈슨과 결혼했으며, 현재 슬하에 말리아(8)와 사샤(5) 등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주말만 되면 어김 없이 가사일을 돕는가 하면 틈만 나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오바마는 누구보다도 가정적이며, 스캔들 하나 없는 ‘깨끗한’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휴일에는 종종 가족의 손을 잡고 동네 극장을 찾는다는 것이 이웃들의 설명.
본격적으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만큼 앞으로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일 터. 아닌 게 아니라 미국 내에서는 벌써부터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극단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았다’ 혹은 ‘고교 시절 마약광이었다’는 등의 흑색선전이나 깎아내리기식 비방이 난무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그가 이런 고비를 매번 슬기롭게 넘기면서 내년 경선까지 잘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단호한 어조로 대응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이제 우리들의 때가 왔습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