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왕선수권 3연패에 ‘테트라지우개’ 히트…상품 개발·판매·평론 맹활약
문구덕후로 성공한 문구왕 다카바타케 마사유키.
“문구를 좋아하던 소년이 그대로 어른이 됐죠.”
어릴 적부터 문구 매력에 푹 빠져 지냈던 마사유키는 1999년 인생의 전기를 맞이한다. 덕력을 차곡차곡 쌓아오다 급기야 대학원 시절 ‘전국 문구왕 선수권’에 참가한 것이다. 일본은 오타쿠 문화가 발달한 만큼 각종 마니아들이 경합을 벌이는 방송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TV도쿄의 ‘TV챔피언’이다. 마사유키는 이 프로그램의 ‘제2회 전국 문구왕 선수권’에 출전해 우승컵을 차지했다. 마니아 가운데 마니아, 진정한 문구 오타쿠로 인정받은 셈이다.
우승 상금은 어디에 썼을까. 마사유키는 “그동안 자신이 써온 문구 리뷰, 칼럼을 묶어 ‘궁극의 문구 카탈로그’를 자비 출판했다”고 밝혔다. 이 경력 덕분에 그는 2000년 유명 문구회사인 선스타문구에 입사한다. 그리고 2001년에 펼쳐진 ‘제3회 전국 문구왕 선수권’과 2005년 제4회 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 3연패를 달성함으로써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덕후의 마음은 덕후가 잘 아는 법이다. 문구 덕후 마사유키가 만든 제품은 역시 달랐다. 10여 년의 회사 생활 동안 그는 히트 상품을 여럿 발표했고, 일본 산업디자인 진흥회가 주최하는 ‘굿디자인상’에서도 8차례나 수상했다.
특히 2008년에 선보인 ‘테트라 지우개’는 “디자인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기하학적으로 어느 방향에서 쥐더라도 안정적이며, 세밀한 부분을 지우는 데 이만한 지우개가 없다. 책상 위에 올려두면 전시 효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수차례 품절 사태를 빚었다. 또 2006년에 기획 개발한 ‘슈레더 가위’도 빼놓으면 서운하다. 각종 명세서나 서류, 카드 등에 표기된 개인정보를 잘게 분쇄해주는 기능으로 롱셀러 제품 반열에 올랐다.
문구왕이 개발한 테트라 지우개. 굿디자인상도 받았다.
2012년 마사유키는 선스타문구 퇴사를 결정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프로 계약’을 맺어 문구왕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예를 들어 대형 문구 매장에 그가 고른 문구 코너를 선보이는 식이다. 스테디셀러, 기능문구, 디자인문구를 각각 ‘쓰다’ ‘지우다’ ‘자르다’ ‘붙이다’ 등 장르별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유명 경제지에도 문구왕이 선정한 회의자료 문구, 회사원을 위한 최신 문구 트렌드를 연재하는 코너가 실린다. ‘진정한 문구 덕후의 추천’이라는 신뢰가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톡톡 튀는 쇼맨십도 ‘문구왕’ 마사유키의 인지도를 넓히는 데 한몫했다.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그는 연필자루 모양의 넥타이를 매고, 왕관을 쓰고 나온다. 외모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가 풍기는 것. 그래서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눈여겨볼 점은 마사유키의 경우 절대 자신이 소개하는 아이템이 최고라고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이 제품이 좋은 것 같다고 겸손하게 권하는 정도다. 가령 일회용 볼펜도 분명히 장점이 존재한다. 볼펜마다 차이가 있고, 그 장점을 발견해 상황에 맞게 찾아 쓰는 것이 문구의 즐거움이다.
마사유키는 “문구는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물건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고, 구입한 날부터 바로 곁에서 친구가 돼 준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문구 붐이 다시 불기 시작한 것이 장기불황과 연관 깊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자동차나 시계 등 고가 상품을 구입하는 이들이 많지만, 불경기에는 비교적 싼 가격에 만족도가 높은 물건을 찾는다. 문구라면 적은 돈으로 자신에게 맞는 물건을 고르고 개성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점이 디지털 시대에 새삼 아날로그 문구가 주목받는 이유로 꼽힌다.
문구로 둘러싸인 문구왕의 방 안. 사진=앳홈복스
얼마 전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웹진 ‘앳홈복스(at home VOX)’가 마사유키의 집을 공개했다. 당시 사진을 살펴보면 현관을 열자마자 세월이 쌓인 문구들이 반긴다. 100여 년 전 건너온 스테이플러 같은 옛 문구들이 즐비, 마치 박물관 같은 모습이다. 방 벽면은 온통 플라스틱 투명케이스로 가득한데,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인 투명케이스 안에는 문구들로 빼곡했다. 누가 봐도 문구왕다운 집이다.
좋아하는 일을 막상 직업으로 삼으면 애정이 식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다행히 마사유키는 “문구에 빠져 이것저것 모으고 분석하다보니 30년이 훌쩍 지났다”고 말했다. 질릴 틈이 없다는 얘기다. 그는 “일상에 딱 맞는 도구를 발견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면서 “취미와 직업이 일치한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덕업일치’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비결이 따로 있을까. 마사유키는 이렇게 언급했다. “일을 부탁받을 경우 100%을 넘어 120% 최선을 다해왔다. 그 20%가 ‘다음에도 같이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흐름을 만들어줬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문구라 그렇게까지 힘을 낼 수 있었다.”
강윤화 외신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