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려서부터 바둑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바둑을 두며 살아왔습니다.”
바둑판만을 대하고 살다보면 운동부족으로 그런 체형이 되기 쉬울 것 같았다. 학자들한테서 책 냄새가 풍기듯 바둑의 기사들에게서도 어떤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가와 바다 야스 나리가 쓴 ‘명인’이라는 바둑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국수인 주인공이 바둑판 위에 놓은 돌 하나하나는 그의 인생이고 철학이고 그가 추구하는 숙연한 도(道)였다. 나는 어떤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걸 도(道)로 승격시켜 평생 수행하는 자세를 좋아한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이 있다. 불교에서는 참선과 경을 염송한다. 기독교에서는 기도하고 묵상한다. 유교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의관정제하고 소리 내어 서책을 읽는 게 도를 추구하는 방법이었다. 일본의 장인들을 보면 자기의 영혼을 담아 만드는 행위를 도(道)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가로세로 열아홉 줄의 좁은 바둑판만 보며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보았을까. 나는 마주앉은 바둑협회 임원에게 물었다.
“바둑은 도(道)입니까?”
“저는 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바둑의 최고경지는 프로기사가 되는 겁니다. 프로가 되는 건 성경속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어렵습니다. 운도 많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프로기사들을 보면 역시 명예나 돈을 추구하는 걸 봅니다. 그런 건 도가 아니죠. 얼마 전에 바둑대회 시상식에 참여해서 우승한 아이에게 상장과 상금을 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의 눈에 초점도 없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뭔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을 주고 나서 그 아이에 대해 살펴봤더니 그 부모가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진학시키지 않은 채 바둑도장에서 숙식을 하게 하면서 바둑만 두게 한 거예요. 그 아이는 바둑을 두는 기계가 되어 버린 거죠. 인문학적 상식도 갖추고 세상을 알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추구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느꼈습니다.”
요즈음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려서부터 골프나 승마 또는 카레이서를 만들기 위해 거기에만 전력을 기울이게 하는 부모의 얘기도 들었다.
내가 밥을 먹어온 법조계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법조문과 판례 속에서 살면서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정신적 장애아들이 많았다. 인간존재의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걸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평생 어떤 것을 추구할 때 그걸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돈이나 상을 타는 명예는 아닐 것 같다. 그건 탐욕이다. ‘너는 진정으로 그것이 즐거운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즐거움으로 추구할 때 진정한 도(道)가 되고 그 일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