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라도 좋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 관타나모 미군기지 수용소를 소재로 한 영화 <관타나모>의 한 장면. | ||
지난 5년 2개월 동안 관타나모 미군기지 수용소에 갇혀 있던 호주 출신의 데이비드 힉스(31)에게 마침내 유죄가 선고됐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 무슨 자랑이겠냐마는 그에게는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분명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유인즉슨 재판은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무작정 감방에 갇혀 지내던 것에 비하면 이제는 적어도 수감생활의 끝은 보이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머지 형량을 관타나모가 아닌 자국인 호주에서 보낼 가능성이 높아진 까닭에 사실상 이번 판결은 ‘석방’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요원과 함께 있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됐던 힉스는 그동안 무죄를 주장해왔으며, 자신은 테러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다고 항변해왔지만 무시당해왔다.
일명 ‘호주 출신 탈레반’이라고 불리는 힉스는 호주인으로서는 드물게 무슬림으로 개종한 케이스다.
14세 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던 그는 그후 이런저런 노동직을 전전하다가 1998년 알바니아로 가서 KLA(코소보 해방군)에 가입했다. 약 2개월 동안 KLA에서 활동하던 그는 호주로 돌아와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아랍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999년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화와 역사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그는 한때 파키스탄 카슈미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투쟁단체인 ‘라시카레 토이바’에 가담해서 게릴라 전투 훈련, 납치 기술, 암살 기술 등을 배우기도 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간 그는 그곳에서 알카에다 군사훈련캠프에 참가했으며 당시 집으로 쓴 편지에 “지금까지 스무 차례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났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는 과장된 것으로 그가 실제 빈 라덴을 만난 것은 여덟 번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던 중 9·11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대테러 보복군사작전을 개시하자 그에게도 악몽이 시작됐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탈레반에 가담했고 또 직접적으로 미국을 향한 테러행위에 가담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탈레반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현장에서 미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지 두 달 정도 지난 2002년 1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수감됐던 그는 처음에는 ‘미군과 동맹군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중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됐으며, 그후 다시 ‘테러단체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라는 혐의를 받으며 수감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 데이비드 힉스의 독방과 그가 1998년 KLA(코소보 해방군)에서 활동할 당시 모습. 작은 사진은 현재 힉스의 모습. | ||
미군들에 의해 발로 차이고 두들겨 맞고 종종 잠을 자지 못하도록 고문을 당하는 것은 예사였다. 말을 듣지 않는 수감자는 좁은 독방 안에서 경비견의 위협을 받으면서 구타를 당하거나 심지어 8시간 동안 내리 맞기도 했다.
좁은 방에 혼자 있다 보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조울증 증세가 나타났다. 가끔 허용된 산책을 나갈 때에는 늘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고 눈은 반드시 가려야 했다. 눈을 가리고 걷기 때문에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했으며, 만일 거부할 경우에는 강제로 먹도록 했다. 단식 농성을 하는 수감자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감금의자에 앉힌 상태에서 튜브를 이용해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군 측은 “수감자를 꼭 살려야 할 경우에만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수감자들을 ‘전쟁포로’가 아닌 ‘적 전투원’이라는 개념으로 감금하고 있으며, 이런 까닭에 정식 재판을 허용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둬두고 있다는 데 있다.
인권단체들은 “죄가 있다면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건만 이런 기본적인 권리마저 무시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힉스의 재판은 사실상 이례적인 일이다.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자가 도착한 지 5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정식 재판이 열린 것이다.
이는 뒤늦게 “무능력한 정부가 자국민을 버렸다”라는 여론을 의식한 호주 정부의 압력과 세계의 눈을 의식한 부시 정부의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빨리 정치적 골칫거리를 없애고자 두 정부가 은밀한 뒷거래를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호주와 미국 정부가 택한 방법은 ‘유죄를 인정할 경우 형량을 줄여주는 거래’였다. 즉, 종신형에서 20년 형으로 감형하고 형량을 호주에서 채우도록 한 것이다.
사실 힉스 본인 스스로도 항소를 하지 않고 유죄를 인정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는 “억울하지만 일단 유죄를 인정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 고민 끝에 어렵게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호주에서는 이와 관련된 법조항이 없기 때문에 석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질 경우 그는 올해 말쯤 지옥 같은 생활을 뒤로 하고 마침내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될 전망이다.
문제는 과연 그가 앞으로 관타나모의 실상에 대해서 얼마나 입을 열 것이며, 또 그의 증언이 추후 관타나모 기지의 존속 여부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