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여 보장 커지면 실손보험 필요성 줄어…“영업방식 바꿔야” 한목소리
문재인 대통령이 8월 9일 오후 ‘문재인 케어’ 발표와 관련해 현장 방문한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검사를 꿈꾸는 청소년 환자와 멘토로 참석한 여치경 변호사의 선물(검찰 기념 머그컵)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사진=청와대
정부는 8월 9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이 정책에는 포괄적이고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건강보험의 비급여 항목을 없애고 보장 영역을 확대, 국민이 직접 부담하는 의료비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이 핵심이다.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아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했던 비급여 항목은 3800여 개에 달한다. 정부는 미용·성형을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고가에 속하는 초음파, 자기공명영상장치(MRI) 등을 포함한 모든 비급여 항목을 2022년까지 단계별로 급여화해 건강보험으로 보장할 계획이다.
비급여 항목은 그간 민간보험인 실손의료보험이 보장해왔다. 실손보험은 가입자가 질병이나 상해를 입어 치료를 받을 경우, 자기부담금을 제외한 의료비를 정해진 한도 내에서 보장해 주는 상품이다.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 보장 영역이 확대되면 실손보험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은 손해율이 높아 업계 입장에선 ‘계륵’ 같았지만, 연간 수십조 원에 달하는 시장이라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보험사 입장에서 이익이 큰 보험은 월 납부액이 높은 연금보험 또는 종신보험이다. 반면 실손보험은 납부액은 적지만 고객층이 광범위하다. 보험사는 부담 없는 실손보험 상품을 먼저 소개하고, 납부액이 큰 다른 상품과 함께 묶는 방식으로 가입을 권유해 왔다. 한 보험설계사는 “아직 달라진 건 없지만, 문재인 케어 발표 후 영업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보험업계에 “공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보완 기능을 해달라”고 주문한 것도 업계 입장에선 압박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금융감독원의 은퇴자와 유병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손보험 상품 도입 구성 논의가 대표적이다. 금감원은 올해 초부터 이 보험 출시를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추진 중이다.
업계는 실손보험 시장이 축소되는 가운데 은퇴자 및 유병자 실손보험이 도입되면 수익성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손해보험협회와 보험연구원 등에 따르면, 2012~2016년 보험사 손해율은 120~130%다. 고령자나 질환이 있는 가입자들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험금 부담도 커지는 고객층으로 구분된다.
또한 보험업계는 문재인 케어와 연계된 금감원의 ‘보험료 인하’ 압박도 우려하고 있다. 앞서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 발표와 동시에 “2013~2017년 진행된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정책에 따라, 민간보험사들이 1조 5244억 원의 반사이익을 누렸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를 토대로 “실손보험료 인하 유도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보험사들은 ‘반사이익’에 대해 실손보험 손해율에 따른 적자로 반박해 왔다. 적자만 연간 1조 6000억 원에 달한다는 주장. 하지만 보험료 인하에 대한 보험업계의 반발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영역이 확대되면, 민간 보험사의 실손보험료 인하 여건이 생기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8월 14일부터 보험사들이 실손보험료를 보험료 산출 원칙에 따라 제대로 책정했는지 감리 중이다. 보험업계는 이번 감리를 두고 금감원이 실손보험료를 얼마나 내릴 수 있을지 명확한 금액을 따져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업계에서 보험료 인하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문재인 케어 자체가 실손보험에 파급력이 크고, 정부도 강조하는 부분이라 보험료는 인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문재인 케어)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다만 문재인 케어 발표 직후 대책 마련에 나섰던 일부 보험사들은 “정책이 실손보험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정부와 보험업계는 이번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건강보험 보장률이 2015년 63%에서 2022년 70%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따른 환자 본인 부담률은 37%에서 30%로 7%포인트 줄어든다는 것이 이유다.
다른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2022년에도 30%는 개인이 부담하게 되는 만큼, 장기 치료나 암과 같은 중대 질병 등의 영역에서 보험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케어와 별개로, 보험업계가 고민에 빠진 이슈는 또 있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놓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처우개선’ 정책 때문이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 형태로 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근로자로 보험사의 핵심 영업인력인 보험설계사 34만여 명이 여기에 속한다. 당시 문 대통령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권리 보호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며 “노동 기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가 대통령 공약에 따라 노동 3권 보장 정책을 도입하면 보험사는 보험설계사들의 고용·산재 보험을 의무로 가입해야 한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정규직을 줄이고 영업직을 늘려온 추세였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고, 수당이 주 수익원인 설계사들 입장에서도 수수료가 낮아질 수 있다”며 “시기적으로 이른 고민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비즈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