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민심 쓸어 담으며 ‘승천 준비’
▲ 주체제를 갖추고 거침없이 대권가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 ||
이처럼 폭풍우를 동반한 거센 먹구름이 여의도 정가를 뒤덮고 있는 가운데 여야 잠룡들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각오로 대권을 향한 칼날을 벼르고 있다. 저마다 안개정국 ‘틈새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민심을 외면하는 정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중장기적인 대권 플랜에 방점을 찍고 있는 분위기다. 여야의 극한 대치로 ‘잔인한 2월’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강·온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망론에 불을 지피고 있는 여야 잠룡들의 틈새전략을 들여다봤다.
“위기는 기회다.”
여야 잠룡군 주변에서 나돌고 있는 말이다. 경제위기 국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이지만 작금의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을 호기로 삼겠다는 잠룡들의 남다른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연말 1차 입법전쟁 이후 냉각 정국이 지속되고 있지만 여야 잠룡들은 당내 역할과 위치에 맞춰 강·온 전략을 구사하면서 중장기적인 대권 행보를 걷고 있는 분위기다.
독주체제를 구축하면서 거침없는 대권가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정중동’ 행보를 보이고 있다. 차기주자 지지율과 관련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 그룹을 5배가량 차이로 따돌리면서 독보적인 대권 입지를 구축한 상황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박 전 대표의 대권 행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자성어는 다름 아닌 ‘우보만리’(소의 걸음으로 만 리를 간다)다. 강한 의지와 끈기를 가지고 한 걸음씩 대권고지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박 전 대표의 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올해 초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보만리’라는 말처럼 올해 한 걸음 한 걸음으로 경제를 살리고 국민통합을 이루길 기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박 전 대표가 정중동 행보만 하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당내 문제나 정치권 현안에 대해 침묵 모드를 유지하다 중요한 순간 제 목소리를 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올해 초 한나라당의 쟁점법안 강행 처리 움직임에 대해 “국민들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며 급제동을 건 바 있고 ‘용산 참사’에 대한 경찰의 강경진압 논란과 관련해서도 “그렇게 급한 일이었느냐”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도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가깝게는 2월 2일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오찬 간담회가 박 전 대표의 참석 여부 및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만남에 초점이 맞춰졌을 정도다. 이 자리에서의 발언 내용이 그의 향후 정치 행보를 예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으로 관측됐기 때문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박 전 대표의 성격과 정치 스타일에 비춰볼 때 간담회 결과와 관계없이 당분간 정중동 행보를 지속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나라당 내 유력한 차기주자인 정몽준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와는 달리 튀는 행보를 걷고 있다. 정 최고는 2월 6일 여의도에 ‘해밀을 찾는 소망’이라는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대권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정치·행정, 외교·통일·국방, 경제, 교육, 문화 등 5개 분야의 정책 개발에 주력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정 최고의 정책 어젠다 개발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해밀’은 비 온 뒤에 맑게 갠 하늘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연구소에는 지난해 한나라당 대표 경선 당시 캠프에서 활약했던 인병택 전 도미니카 대사, 정태용 전 국방장관 보좌관, 홍윤오 전 홍보특보 등이 상근하고 각 분야의 교수 및 전문가 등이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정 최고는 또 사비를 들여 설립한 아산정책연구원을 한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로 성장시키기 위해 지난해 11월 광화문 인근 지상 3층 지하 3층 새 건물에 입주시키는 동시에 연구 인력을 대거 확충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최고위원은 ‘외교행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국회 한미의원외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 최고는 수시로 미국을 오가며 ‘대미외교’ 선봉 역할을 자처하는 등 국제 행보에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정 최고는 당내 입지를 확대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고, 18대 총선 때 뉴타운 공약과 관련해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의욕적인 대권행보에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내 원외 차기주자인 김문수 경기지사는 혼란스런 정국 틈새를 적절히 활용한 대권 행보를 걷고 있다. 비교적 정쟁에서 자유로운 만큼 지역 정책과 민심에 다가가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분위기다.
김 지사는 설 연휴 기간 동안 택시기사 체험을 하며 민심 탐방에 나섰는가 하면 미군기지 이전 및 제2 롯데월드 건설 등 정부 정책과 관련해서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반환 미군기지 2단계 종합발전계획은 지역 형평성에 어긋나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고, 제2 롯데월드에 대해서는 “정서적으로나 비행 안전상 반대하는 성남 시민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지사는 특히 1월 29일 경기도 경제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조찬 포럼에 참석해 ‘제왕적 대통령 불행론’을 역설하기도 했다.
김 지사는 1월 28일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2010년 지방선거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경기도에 할 일이 많아 우선 현안 해결에 모든 힘을 기울여 전력을 다할 생각”이라며 즉답을 피해 재선보다는 대권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 민주당의 개혁성향 의원들로 구성된 민주연대 현판식에 참석한 김근태 전 의장, 정세균 대표, 추미애 의원(왼쪽부터). 유장훈 기자 | ||
특히 민주당 내 유력한 차기주자인 정세균 대표는 대여 강경노선 최선봉에 서 있다. 정 대표는 지난해 7·6 전당대회에서 압도적 승리로 당권을 거머쥐었음에도 대여 투쟁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야성 부재와 지도력 논란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정 대표는 1차 입법전쟁 과정에서 ‘전과’를 거두면서 당내 입지는 물론 대권주자로서 몸값을 한껏 끌어 올렸다. 정 대표가 1차 입법전쟁 선봉장을 맡았던 원혜영 원내대표 대신 2차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배경에는 대여 강경투쟁으로 야성과 지지층 결집을 공고히 하겠다는 대권 전략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는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해 ‘반 MB’ 투쟁에 총력전을 펼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1월 30일 열린 민주당 의원 총회에서 정 대표는 “다른 제정당과 시민단체와 함께 용산참사에 대한 확실한 지적을 하기 위해 청계광장에서 MB악법 저지결의대회를 갖고자 한다”며 본격적인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정 대표가 대여 강경투쟁으로 2차 입법전쟁에서 또다시 전과를 올리고 4월 재·보선을 승리로 이끌 경우 리더십 논란을 잠재우고 당내 입지는 물론 대권가도에도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반면 장외 투쟁으로 국회가 또다시 마비될 경우 거센 후폭풍에 직면할 수 있고 재·보선 공천을 둘러싼 계파 갈등이 폭발할 경우 적전분열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지난해 7·6 전당대회 때 당권에 도전했다 실패한 뒤 침묵 모드를 유지했던 추미애 의원도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걸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해 12월 초 출판기념회를 기점으로 대외활동을 강화한 추 의원은 올 초 ‘MB 악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블로그 정치’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월 14일에는 민주당 ‘한반도대운하 대책특위’ 위원장을 맡아 당직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공약인 대운하건설 논란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차기주자로서 이미지를 한껏 부각시키겠다는 전략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추 의원은 특히 3월부터 생활, 노동, 환경, 교육 등 4대 테마로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전국 투어’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 단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동시에 정체된 지지율을 서서히 끌어올리겠다는 대권 플랜을 본격 가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민주당 내 원외 유력주자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손학규 전 대표, 김근태 전 의장 등에게는 그야말로 위기정국이 더없는 기회일 수 있다.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정 전 장관과 손 전 대표는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조기 복귀론과 4월 재·보선 출마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아직 재·보선 구도가 확정되지 않았고 공천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있어 두 사람의 복귀 및 출마 여부를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2차 입법전쟁 등으로 안개정국이 지속되고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고조될 경우 높은 인지도와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컴백론’에 힘이 실릴 개연성은 충분하다. 재·보선 출마 여부를 떠나 여전히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정 전 장관과 손 전 대표 입장에선 위기정국이 재기 명분을 던져줄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될 수 있는 형국이다.
열린우리당 시절 정 전 장관과 함께 양대 계파를 이끌었던 김근태 전 의장도 위기정국 틈새를 겨냥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민주당의 비주류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는 ‘민주연대’ 지도위원을 맡아 대여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연대는 1월 14일 국회도서관에서 ‘MB악법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라는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MB악법’ 저지를 위한 범국민 저항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민주연대’를 이끌면서 원외 대여 투쟁을 진두지휘하는 동시에 봄학기 한양대 강의도 계속할 계획이다. 김 전 의장 또한 수도권 재·보선 지역이 늘어나 ‘미니 총선’으로 확대될 경우 수도권 출마설이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청문회와 쟁점법안 처리 등으로 여야 간 극한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여야 잠룡들이 향후 어떤 틈새 전략을 구사할지가 2월 안개정국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