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노후자금 다 까먹고 ‘오리발’?
▲ 일본에서 국민들이 납부한 연금 기록이 사라지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안이한 대응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아베 총리. | ||
이런 황당한 사태에 대해 아베 총리를 비롯한 정부와 자민당의 주요 인사들은 “적절히 대처하겠다” “전력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말만 연발할 뿐 누구 하나 뚜렷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사회보험청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시효가 지났다”는 뻔뻔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국민들의 연금 지급이나 기록 조사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아베 정권을 궁지로 몰고 있는 연금사태의 파장을 따라가봤다.
연금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약 1년 전의 일이다. 요코하마에서 자영업을 하는 나카무라 부부는 1975년 결혼과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했다. 당시 국민연금은 20세 이상 강제가입. 따라서 나카무라 부부는 20세 이후부터 실제 가입 당시까지의 미납분으로 부부 합쳐 10여만 엔을 한꺼번에 납부했다. 그런데 2년 전, 한꺼번에 낸 미납분이 여전히 ‘미납’으로 돼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대로라면 부부가 받을 수 있는 연금이 매년 23만 8400엔(약 179만 원)이나 줄어들게 된다.
나카무라 씨는 지역 사회보험사무소에 항의했지만 “당신의 기억이 잘못됐다” “납부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등의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나카무라 씨는 “사회보험청은 이런 저런 핑계로 국민들이 지쳐 포기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카무라 씨 케이스가 알려지면서 야당인 민주당도 국회에서 연금문제를 본격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1986년 후생연금, 국민연금 등으로 분리돼 있던 기존의 연금제도를 전 국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초연금으로 통합했다. 그런데 이름 성별 생년월일 등을 대조하며 기존의 연금기록을 통합·전산화하는 과정에서 입력 오류와 미입력 실수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당시 모토키 가오루 사회보험청 장관이 백업이 완료된 연금대장 원본을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그렇지 않은 원본까지 폐기되는 사태가 발생해 버렸다. 입력 실수를 바로잡을 원본마저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데는 일본 정부와 연금 당국의 안이한 대처도 한몫했다. 연금 수급자들의 항의에 대해 사회보험청은 “(의무가입임에도 불구하고) 연금이 해약됐다”거나 “납부 기록 원본의 글씨가 알아볼 수 없다” 심지어 “동명이인이다”라는 등의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대며 국민들을 되돌려 보내고 있다.
아베 총리가 “납부 영수증이 없어도 최후의 한 명까지 연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구제하겠다”고 한 발언도 논란거리가 됐다. ‘구제’라는 표현이 문제였다. 일본 국민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연금을 지급하지 않은 건 정부의 잘못이다. 사죄를 하고 즉각 연금을 지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구제’ 운운하며 선심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정부가 애초부터 보험료를 돌려줄 의도가 전혀 없는 것 아니냐”고 의구심마저 보내고 있다. 그런 정황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29일 자민당은 “미지급된 연금을 시효가 지난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구제’하기 위해서 국고에서 부담할 액수는 60억 엔(약 452억 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이 축소된 금액이며 이미 발생한 미지급액만 950억 엔(약 7158억 원)이라는 것이 시사잡지 <주간포스트>의 계산이다. 또 이번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아베 총리가 제시한 ‘10억 엔(약 75억 원)의 조사비용’도 마찬가지다. 일본 유명 보험사의 한 간부는 “보험회사에서 수백만 건의 계약을 조사하는 데만도 1000억 엔 이상이 소요되는데, 10억 엔으로 5000만 건의 조사를 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이번 사태를 “끝까지 해결하겠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태도는 정말로 진상을 밝히고 연금을 돌려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본 정부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자민당 고위 간부가 낙하산 인사로 후생노동성의 요직을 차지하고, 사회보험청이 국민연금을 관행적으로 유용한 과정에서 또 다른 비리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사회보험청 장관이라는 자리는 후생노동성의 고위 간부가 은퇴 후 한 번씩 거쳐 가는 것이 관행이며, 연간 약 21조 엔(약 158조 원)의 보험료로 운용되는 연금특별회계는 공공사업을 방불케 할 정도의 거대한 정치적 이권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연금행정의 최상부에는 하시모토 전 총리, 고이즈미 전 총리, 니와 자민당 총무회장, 아베 현 총리 등 소위 ‘후생노동족 의원(후생노동성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민당 의원들)’들이 있었다.
이러한 연줄 때문인지 사회보험청은 그동안 전국 각지의 휴양시설 건설과 운영을 시작으로 스포츠센터와 직원 숙소 건설, 직원 연수비와 공용차량 유지비, 판공비와 같은 사무비용까지 연간 1000억 엔(약 7542억 원) 이상의 자금을 연금회계에서 뽑아 써왔다.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것만 해도 현행 연금제도가 시작된 후로 연금 지급 이외의 용도로 사용된 금액이 5조 5000억 엔(약 41조 4788억 원)에 이른다.
더구나 자민당과 연금당국이 연금 기록이 없어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그동안 쉬쉬하며 숨겨왔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후생노동성의 전직 간부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연금 기록이 5000만 건 이상 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후생노동성이나 사회보험청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자민당 관계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연금 수급자들이 그 사실을 모른 채로 언젠가 사망할 때까지 시간을 끌며 기다리자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고 한다.
출범과 함께 각료들의 스캔들과 총리의 리더십 부재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아베 정권이 이번 연금 사태로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이는 아베 취임 초기의 절반으로 떨어진 30%대의 지지율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후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인 만큼 일본 국민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 정권이 다시 민심을 회복하고 회생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는 7월 29일의 참의원 선거 결과에 달려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