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공습경보’에 배가 산으로
주전파의 주장은 간결하다. “어차피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그룹과의 화해는 물 건너갔기 때문에 ‘분당’을 기본전제로 한 상태에서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선명하게 하자”라고 말한다. 반면 주화파 측에서는 “지금부터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강경대응을 하는 것은 저쪽(친이그룹)의 ‘탈당 유도 덫’에 걸려드는 것”이라며 신중론을 주문하고 있다.
일단 박 전 대표는 대표적 주전파인 김무성 의원의 ‘전쟁 불사’ 의지를 주저앉히고 주화파의 ‘시간싸움’과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적절한 시점에 신당 창당 등 최강수를 두고자 하는 주전파의 뜻을 따라야 할 때가 올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이재오 3월 대공습’을 대비해 열심히 방공호를 파고 있는 친박그룹의 방어 전략을 짚어봤다.
친박그룹의 ‘이재오 포비아’(Phobia·공포의 감정이 강박적으로 특정대상에 결부되어 행동을 저해하는 이상반응)는 뿌리 깊다. 일부에서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귀국은 한나라당 분당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의 귀국을 두고 친박그룹은 주전-주화파로 나뉘어 치열한 내부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먼저 주전파는 “이번 개각이 친이그룹과 친박그룹이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시험대였다”라고 단언한다. 김무성 의원을 비롯한 친박그룹의 주전파는 “역대 정당 사상 친박계만큼 조용한 비주류가 있었나. 1년이면 그동안 많이 참은 것이다. 이제는 뭔가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 친박그룹의 입각이 물 건너갔기 때문에 ‘한 지붕 두 가족’에서 별거하는 수순만 남았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박 전 대표의 공개 경고에 계파 모임 등을 자제하고 있지만 이미 분당을 전제로 독자적인 행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강경론을 주도하고 있는 주전파의 전략은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어차피 알려진 계파이기 때문에 굳이 모임 자체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하에서 아예 친이그룹의 ‘안국포럼’ 같은 대표적 모임을 공개적으로 출범시키자는 게 첫 번째 전략이다. 여기에 그동안 정치 현안에 대해서 대안이 있는데도 굳이 숨기는 것도 ‘눈 가리고 아웅’식의, 정정당당하지 못한 대처였다는 점을 인식하고 아예 현 정권의 문제점을 야당 이상으로 강하게 따지자는 것이 두 번째 전략이다.
주전파의 이런 강경책에는 ‘이재오 포비아’가 숨어 있다. 친박그룹 소속 한 전직 의원은 이에 대해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귀국하게 되면 분명히 칼바람이 불 것이다. 그에게 올해는 자신의 정치생명이 걸린 마지막 해다. 올해 재기하지 못하면 끝장이 난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것도 이명박 대통령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 한 번 권력에서 멀어지면 웬만해선 재기하기 어렵다. 노회한 그가 이런 정치판의 법칙을 모르겠는가. 돌아오면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상상 이상의 재기 프로젝트를 풀어놓을 것이다. 일단 ‘조심 모드’로 귀국하겠지만 분명히 친박그룹을 압박할 카드를 갖고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 이 전 최고위원 측이 4월 당협위원장 인선을 앞두고 자파 세력 확대에 조용히 나서고 있는 것도 친박그룹 주전파의 강경책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 창립대회를 열고 출범한 ‘원외 당협위원장협의회’의 다수가 친 이재오 계열로 분류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그들을 ‘이 전 최고위원 귀국 뒤 그의 재기 프로젝트를 측면에서 지원해 줄 사실상의 친위조직’으로 보고 있다. 친 이재오 계의 저인망식 세력 확대 전략에 친박그룹이 또 다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주전파의 강경책이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주전파는 이런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움직임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계파모임을 확실하게 띄워 공개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총선 공천 때처럼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우왕좌왕하다가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영남권의 한 친박 의원은 “당협위원장 인선, 이재오 전 최고위원 귀국 등 당내 정해진 일정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한 최측근 인사는 이와 관련해 “김무성 의원이 상황을 크게 잘못 읽었다. 지금 나라경제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계파모임을 만들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박 전 대표를 어떻게 보겠느냐”라며 김 의원의 ‘정무감각 부재’를 꼬집었다. 그는 또 “박 전 대표의 용병술은 기본적으로 계파모임 등을 통해 조직을 관리하지 않는 ‘무(無) 관리의 관리’다. 지금이 경선이나 대선 때도 아닌데 조직을 만들겠다고 한 김 의원이 박 전 대표의 기본 원칙을 침해한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주화파는 또한 주전파의 선제대응이 오히려 자파의 탈당을 재촉하는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으로 본다. 주전파의 강경책은 이재오 전 최고위원 측의 ‘탈당 유도책’에 말려드는 미숙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사실 향후 당권을 바라보고 있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으로서는 ‘앉아서 당을 내주느니 차라리 친박그룹이 짐을 싸고 나가도록 계파 갈등을 부추겨 탈당을 유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공성진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를 향해 “냉소적인 자세로 이 정권에 반대하면서 순간적인 인기에 연연해 차기 대권주자가 되려는 자는 잘못 됐다”라며 직격탄을 날려 또 다시 당내 분란을 야기한 것이 탈당 유도책의 첫 번째 ‘작전’이라는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특히 이재오 전 최고위원 측으로서는 경제 위기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친박그룹의 무관심 행보를 공격하는 것은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꽃놀이패다. 친박그룹의 ‘무관심 모드’를 비판해 계파정치의 폐해를 노출하면 할수록 그것이 박근혜 전 대표를 계파정치의 한 수장으로 깎아내리는 동시에 친박그룹이 소아병적 권력투쟁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을 자초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주전파는 주화파의 ‘시간싸움’이야말로 대증적인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주전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우리가 협조적인 모양새를 띠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지방선거 아니면 2012년 총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도 별다른 수가 없다. 어차피 이명박 정권과는 결별을 해야 한다. 이 정권도 우리에게 협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개각에서도 물을 먹은 게 아닌가. 언젠가는 배신을 당할 것인데 뭐 하러 당에 남아서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가. 차라리 짐을 일찍 싸는 게 낫다. 박 전 대표가 예전에 한 번 탈당해 실패한 전력이 있는데 이번에는 장외에 친박연대라는 기존 정당조직도 있다. 그 조직을 확대 개편하면 창당에 대한 부담도 별로 없다. 국민들에게 더 이상 회색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느니 차라리 선명하게 친박그룹의 노선을 보여주고 우리의 지지기반을 일찌감치 확대해나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화파의 입장을 비판하는 주전파는 ‘공동책임론’도 거론하고 있다.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이명박 정권과 한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배가 침몰할 경우 뛰어내리기에는 너무 늦는다는 것이다. 친박그룹이 한나라당 소속인 이상 이명박 정권의 실패시 공동책임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배에서 일찍 뛰어내려 새로운 배로 갈아타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재 박근혜 전 대표는 주화파가 주장하고 있는 시간과의 싸움에 들어간 모양새다. 이와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속도조절론을 주문하며 주전파가 주장하는 ‘여당 내 야당 역할 전략’도 일부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향후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칼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시기가 올 때쯤이면 박 전 대표도 병자호란 때처럼 주전파의 입장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인조는 ‘청나라 군대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의 주장을 들어줬다가 청나라 10만 대군의 공격을 자초,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주전론’의 경우 실패의 후유증이 극심하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 전 대표가 과연 주전파의 주장을 수용할 만큼의 정치적 배짱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결국 박 전 대표의 선택에 따라 친박그룹과 한나라당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