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처럼…멋쟁이 김옥숙 차분하게 ‘톤 다운’
김 여사가 밝힌 대로 청와대 생활엔 외롭고 힘든 고행의 순간들도 많을 것이다. ‘대통령 남편’을 둔 탓에 감내해야 할 일이 적지 않은 동시에 ‘제1참모’의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영부인의 몫이다. 과연 역대 영부인들은 어떤 내조법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몇 해 전 실시됐던 한 설문조사 결과는 영부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대권후보 배우자가 당선에 영향을 주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한 학자·교수 100명 중 64명이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은 6.2%에 불과했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이 되기 전 후보 시절부터 ‘퍼스트레이디 후보’도 함께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에는 현 영부인 김윤옥 여사를 제외하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까지 총 9명의 퍼스트레이디가 있었다.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영부인론>(나남출판)에서 역대 영부인에 대해 ‘전통적 내조형’(홍기·손명순) ‘베갯속 내조형’(프란체스카·김옥숙) ‘활동적 내조형’(육영수·이순자) 등으로 분류했고, 언론인 출신 조은희 박사는 <한국의 퍼스트레이디>(황금가지)에서 ‘여성지도자형’(이순자·권양숙)’ ‘국민호감형’(공덕귀·홍기·손명순)’ ‘업적형’(이희호) 등으로 나누기도 했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의 영부인들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먼저 ‘은둔형’ ‘베갯속 내조형’ 등으로 불린 프란체스카 여사는 정치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외부 정보를 차단해 결과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통령에게 ‘인의 장막을 친 사람’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노회한 남편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주변의 분석.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쓴 것이 바로 그녀의 가장 우선된 내조법이었던 것. 하지만 이렇듯 남편의 일상을 과보호하는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과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신여성으로 의사소통이 편해서 친했던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 씨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고 한다. 그가 프란체스카 여사의 개인비서로 일하며 세상사를 들려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세간에는 “박마리아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까지 퍼졌을 정도.
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풍습을 따르려 애썼고 살림살이도 알뜰히 했다. 직접 가계부를 일일이 쓰고 항상 요리사와 함께 장보는 일을 챙겼다. 한 번 산 물건은 닳고 닳아서 쓸 수 없을 때까지 썼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았던 이화장에는 50년이 넘도록 쓴 냄비와 밥그릇, 40년이 넘은 한복, 입던 한복 천으로 만든 손가방 등이 남아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일본 유학을 마친 신여성이었지만 내각책임제하의 영부인으로서 정치적 활동은 철저히 자제됐다. 혼란기에 영부인직을 맡았던 공 여사는 군사 쿠데타 이후 감시와 협박 속에 명색뿐인 청와대 생활을 했던 자신의 처지를 ‘조롱 안의 새’로 표현하기도 했다. 항상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면서 지냈던 생활이 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공 여사는 ‘정치에 관심이 없으셨나봐요’라는 질문에 “관심이야 있었죠. 그러나 잘못하면 여자가 너무 나선다고 할까봐, 그리고 나 자신이 정치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관심은 있지만 여러 가지로 조심을 했지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영부인직에 있을 때보다 이 자리를 떠난 뒤 구속자 석방운동, 기생관광 반대운동 등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다.
가장 존경받은 퍼스트레이디로 손꼽히며 ‘국모’의 이미지를 만든 육영수 여사는 ‘후배 퍼스트레이디’들에게도 ‘롤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이순자·김옥숙 여사는 훗날 육영수 여사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애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자서전 <동행>에서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육 여사는 영부인이 되면서 ‘청와대의 지독한 야당’이 되겠다고 공언했는데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언을 자주한 탓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육 여사가 데모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만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박 전 대통령에게 전했는데 그 과정에서 열 받은 박 전 대통령이 ‘임자가 뭘 아냐’면서 주먹을 날렸다는 것.
하지만 육 여사의 정보력은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 여사는 ‘여성편력’이 심했던 남편을 둔 탓에 맘고생도 적잖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편을 대신해 서민의 삶을 직접 돌아보고 챙기는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양지회를 만들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노력했는데 특히 나환자들을 일일이 안고 악수하며 돌봐주던 모습은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줄 정도였다.
이러한 육 여사의 모습은 박 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절대적인 정서적 의지처가 되었다. 실제로 육 여사의 사망이 박 전 대통령을 고독하게 만들어 유신체제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타가 되었다는 증언도 많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에게 보냈던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도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는 가장 짧은 기간 동안 퍼스트레이디를 맡았다. 재임 기간이 짧아 제 색깔을 많이 낼 수는 없었으나 홍 여사는 ‘소박하며 서민적인 분위기의 보통 주부 퍼스트레이디’라는 평을 받았다. 퍼스트레이디로 취임한 날 기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홍 여사는 자신의 내조관을 이렇게 밝혔다.
“평소 퍼스트레이디가 되리라곤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중책이라 대통령의 건강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고, 국민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퍼스트레이디가 되었지만 홍 여사의 태도나 모습은 달라진 게 없었다. 퍼스트레이디일 때나 아닐 때나 생활방식이 한결같았으며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영부인이었으나 근검한 성품으로 공직자의 자세로선 완벽하리만큼 성실했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평가다.
41세의 젊은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순자 여사는 당당하고 적극적인 여성형이었다. 처녀 시절 무일푼의 처지를 비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절교선언을 하자 자신이 나서서 결혼식장을 잡고 결혼날짜를 잡았던 일에서도 적극적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이 여사는 군인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면서 재테크나 자식 교육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남편 부하의 부인들에게 이런 충고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인생은 짧다. 군인 부인의 인생은 더 짧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을 집안일로 골치 아프게 하면 안 된다. 군인의 아내는 요구가 많으면 안 된다. 어머니 몫, 주부 몫뿐만 아니라 아버지 몫, 가장 몫까지 해야 하는 게 군인의 아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그림자 내조’로 상징된다. 김 여사는 전임 이순자 여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의식해 청와대에 있는 동안 자신과 관련한 모든 행사를 언론에 알리지 않았고 단 한 건의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부속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영부인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을 정도.
특히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는데 개인적으로 대단한 멋쟁이였음에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온화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애썼다. 육영수 여사 스타일을 본 따 이미지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김 여사는 어린 시절 대구의 한 미장원 원장으로부터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권위주의 탈피를 주장한 김 여사는 자신을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 부인’으로 불리기를 원해서 청와대의 공식문서와 언론에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베갯속 영향력’(Pillow Influence)을 가진 영부인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는 겉으로는 대통령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볼 때는 어느 다른 수단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일부 학자들 사이엔 김 여사가 ‘베갯속 영향력’을 통해 남편을 ‘귀가 큰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대학 3학년 때인 20대 초반 시절 동갑내기 대학생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결혼한 손명순 여사는 학창시절부터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을 위해 자신만의 내조법을 만들었다. 가난을 참는 것,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것, 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손 여사는 집에 오는 손님을 절대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정가에는 ‘상도동집에 가면 언제든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먹을 수 있다’는 얘기가 오르내렸다.
손 여사는 남편의 정치적 행보에 대체로 참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옥순 전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된 후 김 전 대통령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많은 민주화 동지들이 그나마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 여사 덕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성격상 정적이 많은 편인데 이들이 독기를 품지 않게 된 데에는 손 여사의 공이 많다는 것이었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직후 한 인터뷰에서 손 여사는 “환경보호와 건전한 소비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다”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우선 청와대 식당 메뉴를 칼국수, 설렁탕, 갈비탕 등으로 간소화하고 식당 운영을 셀프서비스 방식으로 바꾸고 ‘음식은 남기지 맙시다’라는 표어를 붙였다.
손 여사의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신문 읽는 일이었는데 10여 종의 신문을 보고 언론에 비친 남편의 모습을 모니터링했다고 한다. 특히 독자투고란을 꼼꼼히 읽어 우리 사회에 소외된 부분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한번은 강원도 평창의 묘목 시험장의 야생화가 썩어간다는 제보를 읽고 청와대 조경을 야생화로 바꾸기로 한 뒤 직원들과 함께 야생화를 심었다고 한다. 또 바이올리니트스 장한나가 한때 악기가 없어서 제대로 활동을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업봉사모임을 통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는 후문.
손 여사는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 부인들을 자주 만나지도 않으며 소극적인 내조를 펼쳐갔다.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옷의 라벨도 떼고 입었으며 청와대로 들어온 선물도 대부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손 여사의 성품으로 인해 손 여사를 통한 ‘안방 로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손 여사는 얼굴의 백반증으로 인해 화장을 유독 짙게 해서 ‘가부키 화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스트레스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의학계의 설명이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내조를 했다. 김 전 대통령과 40여 년의 고난의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 자신이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던 이 여사는 청와대에 입성한 뒤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펼쳐 ‘뚜렷한 업적형’ 퍼스트레이디로 불리기도 한다.
동교동 시절부터 검소한 것으로 유명했던 이 여사는 청와대에서도 똑같이 생활했다. 침대를 제외하고 의자, 식기 등 대부분을 전임자인 손명순 여사가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저 살림살이 중 이 여사가 바꾼 것은 커튼 하나뿐이었다고. 이 여사는 독립적인 퍼스트레이디로서 청와대에 있는 5년 동안 총 다섯 차례 단독 해외방문을 하기도 했다. 특히 2002년 5월에는 영부인 중 최초로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겼다.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 여사는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학자들은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고령의 나이(76세)에 영부인이 된 이희호 여사가 10년만 젊은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다면 한국 퍼스트레이디사의 지도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초반과 후기에 조금 다른 내조 스타일을 보였다. 임기 초중반 혼자 공개된 자리에서 언론을 만나는 일을 피하며 ‘조용한 청와대’ 만들기를 목표로 삼았던 권 여사는 임기 후반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나서는 등 ‘국민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노 전 대통령의 방침을 함께 수행했다.
특히 ‘탄핵정국’ 당시엔 노 전 대통령에게 권 여사의 내조는 가장 큰 힘이 됐다는 후문. 당시 두 달여 동안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관저에서 보내며 마음고생을 함께해야 했다. 권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대통령과 함께 관저 안 작은 뒤뜰이나 상춘재 툇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우고 촛불을 밝혀든 국민들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자료협조=출판사 황금가지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