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명예훼손 항소심서도 무죄…기자회견서 첫 심경고백
아직 앳된 목소리가 울먹임과 떨림으로 이야기를 수차례 멈추면서도 마지막 한 마디만큼은 또렷하게 끝맺었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박유천 성폭행 사건 피해 여성의 기자회견에 직접 참석한 두 번째 고소 여성 A 씨였다. 그는 박유천의 성폭행 수사 과정에서 박유천 측에게 무고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날은 그의 2심 선고 기일이기도 했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성폭행 혐의로 박유천씨를 고소했다가 무고로 역고소당한 A씨와 이은의 변호사가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에서 사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A 씨는 가림막 뒤에서 심경을 진술했다. A 씨의 변호인인 이은의 변호사는 “A 씨에 대한 인신공격성 악플과 사생활, 개인정보 침해 등을 우려해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약 5분 정도 이어진 심경 진술에서 A 씨는 몇 차례나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변호사와 A 씨에 따르면, A 씨는 2015년 12월 16일 자신이 일하던 유흥업소 주점 화장실에서 박유천과 ‘원치 않은 성관계’를 가졌다. 이 업소는 유흥업소이긴 하지만 지자체에 신고를 한 ‘합법 업소’로 이른바 2차라고 불리는 성매매는 허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 업소의 종업원들은 오전 4시까지 근무하도록 돼 있었으나, 사건 당일 A 씨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오전 1시 30분에 조기 퇴근했다”고 말했다. A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집(본가)에 너무 가고 싶었다. 너무 가고 싶었는데 갈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서 퇴근 후 주차된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차라리 여기서 연탄불을 피고 자살을 할까, 그렇게 해서 내 휴대전화를 경찰이 조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눈물이 터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날 새벽 A 씨는 결국 다산콜센터에 신고했고, 신고를 넘겨받은 경찰에게도 같은 내용의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그러나 곧바로 철회했다. “박유천이 너무 유명한 연예인이라 세상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는 이유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신고를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사건 당일 착용했던 생리대를 6개월 동안 보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6월 박유천의 유흥업소 종업원 성폭행 연쇄 피소 사건이 보도되면서 신고를 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사건 당시에 A 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던 경찰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다시 신고를 해달라”고 한 말을 기억해 그 경찰관에게 신고했다. 피해자가 많았고, 피해 상황도 비슷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박유천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배우 겸 가수 박유천이 지난해 6월 30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는 모습. 고성준 기자
그런데 도리어 A 씨가 무고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피소됐다. 당시 박유천 사건과 관련해 YTN과 MBC <PD수첩>의 취재에 응해 인터뷰를 한 것이 명예훼손이라는 것이었다. 사건 당일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진술해 왔던 A 씨는 설마 검찰이 자신을 기소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은 그를 구속 기소해 재판으로 넘겼다.
A 씨는 “검찰청에서 수갑을 차는 순간 울부짖었다. 수사기관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에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라며 “진정된 후에는 대체 가해자(박유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수사기록을 보고 싶었다. 봤더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 뿐이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A 씨에 따르면 박유천의 수사 진술 기록에는 유흥업소 직원에 대한 편견도 포함돼 있었다. A 씨는 “유흥업소 화장실에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당하는 것이 유흥업소 직원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유흥업소 직원이 아닌 젊은 여성들에게는 또 자연스러운 일인가?”라며 “유흥업소 직원이기 전에 평범한 여성인데 그런 여성들이 네 명이나 같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돈을 보고 고소한 것이고 무고라고 한다”라고 말하며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무고죄 등에 따른 1심 재판에서 검사도 A 씨에게 상처가 될 말을 이어갔다. A 씨는 “법정에서 가해자(박유천)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걸 들으며, 그 얼굴을 마주하며 고통스러웠고, 제 신체의 일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재판장에서 오고 가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검사에 대해서도 “검사는 제게 ‘왜 피를 수건으로 닦지 않았나’ ‘허리를 돌리면 성관계를 피할 수 있는데 왜 그러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유천이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화장실에 갔고, 그 곳에서 몸이 돌려지고 눌려진 채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라며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애원했던 그날의 비참한 광경이 제 머리 속에 생생한데, 법이 처벌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당한 일이 성폭력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A 씨의 1심과 2심 변호를 담당한 이은의 변호사는 “2심까지 이어진 재판에서 드러난 사실은 A 씨가 박유천에게 사건이 발생한 화장실을 가자고 한 게 아니라 박유천이 먼저 가자고 했다는 것은 양자 간 진술이 일치한다는 것”이라며 “거기서 나눈 얘기에 대한 일관된 진술을 보더라도 성관계에 합의한다고 볼 만한 대화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는 보지 않는다”라면서도 “다만 이번 재정신청에는 1심, 2심 판결문과 함께 박유천이 법정에서 했던 증인신문 녹취록을 제일 중요한 증거 사실로 제출할 예정”이라며 “이를 보고 재수사 결정을 내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볼지는 모른다. 나머지는 사법부의 몫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유천은 지난해 6월부터 이어진 유흥업소 종업원 성폭행 연쇄 피소 사건에 휘말렸으나 수사과정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자, 첫 번째 고소 여성과 A 씨 등을 무고 등 혐의로 고소했던 바 있다. A 씨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만장일치 무죄 판결을 받았고 2심에서도 판결이 유지됐다. 이후 이은의 변호사가 박유천의 성폭행 무혐의 재수사를 요청하는 재정신청을 냈다.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법원의 기소 명령에 따라 재수사와 정식 재판이 진행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