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함부로 ‘낙하산’ 투하하래! 윗선은 심기불편
국내 금융권 최고의 꽃보직 중 하나로 알려진 한국거래소 이사장 후보군 발표를 하루 앞둔 지난 12일, 한국거래소는 전례 없는 공고를 냈다. 십수 명의 쟁쟁한 인사가 지원했고, 이미 ‘내정설’이 나도는 후보까지 있는 상황임에도 이사장 후보를 추가 모집한다고 전격 발표한 것.
한국거래소의 신임 이사장 선임이 파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마감된 이사장 공모에는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이철환 전 시장감시위원장, 김재준 현 거래소 코스닥시장위원장, 최홍식 전 코스닥시장본부장, 박상조 전 코스닥위원장, 이동기 거래소 현 노조위원장, 유흥렬 전 노조위원장 등 약 10명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가 이사장 선출 과정에서 재공모까지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이날 거래소는 1차 지원자 중 3명을 면접 대상자(숏리스트)로 추려 발표하려 했다. 이후 면접을 거친 뒤 오는 28일 예정된 임시 주주총회에 최종 후보자를 추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재공모를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정치권 개입설이 흘러 나왔다. 후보군을 마뜩찮아 하는 핵심 권력이 교체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거래소 이사장을 선임하는 공식 절차는 이사후보추천위원회(추천위)에서 후보를 추대하고 주주인 증권사와 선물회사로 구성된 주주들의 총회에서 결정하면 금융위원장의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으로 정한다. 사실상 이사장을 결정하는 추천위는 거래소의 사외이사 5명과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대표 각 1명, 금융투자협회 추천 2명, 이렇게 9명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 사실상 금융당국을 통해 청와대가 낙점하는 구조로 이뤄져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인 2013년 6월 있었던 후보 공모에는 11명이 지원했는데, 새누리당 의원 출신과 모피아(기재부 출신 마피아) 등이 거론되면서 낙하산 논란이 인 끝에 기재부 출신 최경수 전 이사장이 선임됐다. 또 작년 정찬우 전 위원장을 선임할 당시에도 그를 단독 후보로 추천해 주주총회에서 찬성투표를 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재공모가 이뤄진 적은 없다. 거래소 이사장 자리를 원하는 세력들끼리 ‘물밑 협상’을 거쳐 조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번 이사장 공모절차 중단을 두고 핵심 권력층에서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무대 뒤에서 조율 실패가 외부에 노출될 정도라는 것이다.
금융권은 이번 재공모의 핵심 원인으로 김조원 전 감사원 사무총장의 금융감독원장 낙마 사건을 꼽는다. 당초 ‘사실상 확정’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던 김 전 총장은 금융과 관련한 경력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시민단체가 반대하면서 결국 막판에 교체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최흥식 전 하나금융지주 사장이 차지했다.
문제는 김 전 총장이 문재인 대통령 대선 캠프 측이 밀었던 인물인 데 반해 최흥식 원장은 장하성 정책실장이 지원한 인물로 꼽힌다는 점이다. 금융권 소식통들에 따르면 문재인 캠프와 장하성 실장은 이번 정부의 금융권 양대 권력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금융권에 대한 양측의 영향력을 적정선에서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장하성 실장의 대학동문인 최종구 전 수출입은행장이 금융위원장에 오른 만큼 대선 캠프 측 인사인 김조원 전 총장이 금융감독원장을 맡았다면 힘의 균형이 맞춰지는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이 낙마하고, 그 자리를 최 원장이 차지하면서 일이 꼬였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이런 와중에 시작된 거래소 이사장 자리에 또 다시 장하성 실장 라인으로 분류되는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이 유력후보로 떠오르자 캠프 출신들이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 금융권의 전언이다.
김 전 원장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부산저축은행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다. 2013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뇌물혐의라는 주홍글씨는 이후에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 전 원장은 무죄 판결을 받은 후 IBK기업은행장이나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복직하려고 했지만 무산되자 결국 공직을 떠나 야인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장하성 라인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장하성 실장의 경기고 동문인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김 전 위원장은 최측근인 김 전 원장이 저축은행 사태에 연루돼 공직을 떠난 일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김 전 원장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사외이사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거래소 이사장 후보로 적극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재공모가 실시되면서 그는 사실상 후보군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김 전 원장의 이사장 선임을 위해 들러리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오지만, 장하성 라인과 캠프 출신 간 파워게임의 희생양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미 김 전 원장은 공석이 된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금융권의 관심은 김 전 원장을 대신할 새로운 후보가 누구냐에 쏠린다. 우선 거론되는 대선 캠프 출신 인물로는 김성진 전 조달청장이 꼽힌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했다. 행시 19회 출신인 김 전 청장은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심의관, 경제협력국장,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을 거쳐 제25대 조달청장을 역임했으며, 자본시장연구원 고문과 숭실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했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활동했으며, 지난 대선에서도 비상경제대책단에 몸담았다. 정찬우 전 이사장에 앞서 거래소를 이끌었던 최경수 전 이사장도 조달청장 출신이다.
장하성 실장 진영의 인물도 만만치 않다. 장 실장의 경기고 선배인 진영욱 전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이 눈에 띈다. 진 전 사장은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국제금융 업무를 함께한 경력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아무리 낙하산 자리라지만 이번처럼 교통정리가 안 되는 모습이 외부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