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답지 않다고?’ 고소녀 재정신청 VS 박유천 상고 ‘맞불’
지난해 6월, 유흥업소 종업원 4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피소됐던 박유천은 이 가운데 첫 번째 피해 여성과 두 번째 피해 여성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첫 번째 여성의 경우는 박유천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고 협박했던 점이 인정돼 항소심에서도 징역 1년 8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두 번째 피해 여성 A 씨는 무고 혐의 외에도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박유천 사건이 보도되던 시점에 YTN과 MBC <PD수첩>에 출연, 박유천에 대해 허위로 진술했다는 이유였다.
21일 오전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성폭행 혐의로 박유천씨를 고소했던 A씨와 이은의 변호사가 2심에서 무고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에서 사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당시 피고인(A 씨)의 입장에서 피해자(박유천)와의 성관계가 성폭행으로 인식될 수 있는 충분한 사정이 존재하였으므로 피고인의 고소 취지와 인터뷰 내용은 무고죄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허위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라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9월 21일 진행된 2심 재판의 재판부도 동일하게 받아들인 부분이다.
박유천이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A 씨 사건’은 무고와 명예훼손, 그리고 성폭행이 각각 대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가려지게 됐다. 사건번호를 따로 부여 받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연관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결정이 다른 한 쪽에 충분히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박유천 측의 상고도 A 씨 측의 재정신청을 어느 정도 의식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8월 말 A 씨 측은 검찰의 박유천 성폭행 무혐의 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 재정신청이란 고소인 또는 고발인이 수사기관의 불기소 결정에 불복할 경우, 법원에 직접 그 결정이 타당한지 다시 묻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법원은 수사기관의 결정을 존중하기 때문에 심각한 수사 미진 사항이 있었거나 법적 절차가 잘못된 경우가 아니라면 재정신청은 대부분 기각된다.
특히 형사 소송에 있어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가 없이 피해자의 진술이나 정황증거에 의존해야 하는 성범죄 사건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 A 씨의 변호인 이은의 변호사는 “단순히 재정신청이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을 떠나 온전하게 피해자 그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결정을 바라기 때문에 신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A 씨의 재판에서 검찰은 A 씨의 사건 당시와 그 직후의 태도를 지적하며 “성폭행 피해자답지 않았다”라며 이를 A 씨의 무고 혐의를 입증하는 근거로 내세워 논란이 일기도 했다.
21일 오전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성폭행 혐의로 박유천씨를 고소했던 A씨와 이은의 변호사가 2심에서 무고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에서 사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이번 재정신청에서 A 씨 측이 제출할 자료는 세 가지다. 1심 판결문, 2심 판결문, 그리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유천의 증인 신문 녹취록이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새벽까지 진행됐던 1심에서는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무죄가 결정됐다. 박유천과 성관계를 맺던 당시 폭력이나 위협 등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합의하지 않은 관계였기 때문에 A 씨가 성폭행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인정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합의 하에 한 성관계” “A 씨 측이 먼저 접근한 것”이라는 박유천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지막 증거 자료인 박유천의 증인 신문 녹취록은 A 씨 측이 가진 히든카드다. 성폭행 혐의로 피소됐던 박유천은 A 씨 사건과 관련해 경찰, 검찰, 법원 등 세 차례에 걸쳐 진술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말이 바뀌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경찰 조사에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던 부분을 증인 신문에서는 막힘없이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기도 했다.
당시 박유천의 증인 신문은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경찰 조사와는 전혀 다른 증언이 계속 돼 A 씨와 변호인을 황당하게 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A 씨는 9월 21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박유천이 무슨 말을 했는지 보여주고 싶다. 앞뒤가 맞는 말이 전혀 없는데 검찰이 그걸 어떻게 믿고 내 주장을 허위주장이라고 했는지…”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성폭행 사건으로 강남경찰서 출석 당시의 박유천.
다만 증거가 갖춰졌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성폭행 판결에서는 행위의 강제성 여부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재판부의 해석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무고죄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당시 상황이 A 씨가 성폭행으로 인식할 수 있을 만했다는 점이 인정됐기 때문일 뿐 정확하게 행위를 성폭행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재정신청에서의 관건은 재판부가 그 상황을 A 씨가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인지, 객관적으로 봐도 강제성이 있는 행위가 이뤄졌던 것인지 가리는 것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박유천은 4건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A 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성들은 재정신청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A 씨의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수사가 재개될 경우 A 씨의 사건에 대해서만 정식 재판이 이뤄지게 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