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쥔 패가 뭐기에… ‘다이’는 없다
▲ 전북행 당 지도부의 불출마 요청에도 불구하고 27일 저녁 정동영 전 장관은 전주로 내려가겠다며 승용차에 올랐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4·29 재·보선 정국을 달구고 있는 최대 핵뇌관은 단연 정 전 장관이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여야 거물급 대다수가 출마를 포기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출사표를 던진 거물급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 전 장관은 고향(전주 덕진) 출마를 고수하고 있는 반면 당 지도부는 정 전 장관의 출마 포기를 다각적으로 압박하고 있어 자칫 당내 계파 갈등을 넘어 분당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세균 대표는 3월 27일 당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재·보선 불출마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고향 출마 의지를 꺾지 않고 여차하면 무소속 출마도 불사한다는 배수진을 친 상태다.
3월 22일 귀국한 정 전 장관은 23일까지 전주에 머물다 24일 서울로 상경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 대표, 민주당 지도부와 원로들을 두루 접촉하면서 자신의 고향 출마를 타진해 왔지만 상황은 녹록지가 않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분열돼선 안된다”며 정 전 장관의 출마 강행을 간접적으로 만류했다.
정 대표와 중진 원로들도 대부분 검찰발 사정태풍으로 민주당이 위기상황에 직면한 만큼 정 전 장관의 대승적 결단을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당 지도부의 공식적인 불출마 요청을 전달받은 정 전 장관은 3월 27일 저녁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로 내려가기 직전 여의도 모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난 정 전 장관은 “저는 오늘 전주로, 전주 시민 곁으로 간다.
전주로 가서 그분들의 어려운 사정과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쯤 서울에 올라올 계획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당분간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해 정 대표와 당 지도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정 전 장관의 전주행은 그동안 자신의 출마에 부정적인 당 지도부와 공천문제를 둘러싼 입장차만 확인한 만큼 여차하면 무소속 출마 등 ‘마이웨이’를 걷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정 전 장관 입장에서는 당 지도부의 요구를 수용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자니 집권당 대선주자였던 이미지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래저래 사면초가 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형국이다.파국을 막기 위해 당 지도부가 정 전 장관을 인천 부평을 지역에 전략공천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회의적인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국 공천 문제를 둘러싼 당내 갈등을 봉합하느냐 아니면 파국을 불사할 것이냐는 정 전 장관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4·29 재·보선을 통해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귀환한 정 전 장관이 자존심을 꺾고 백의종군을 선택할지, 아니면 정치생명을 담보로 마지막 승부수를 선택할지 중대 기로에 서 있는 형국이다.최근 귀국한 ‘왕의 남자’ 이재오 전 최고의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전 최고는 자신에게 쏠린 관심과 시선을 우려해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극비 귀국을 선택했고 당분간 현실 정치에서 한 발 떨어져 있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권 2인자인 이 최고가 국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적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친이계(친 이명박 대통령)의 좌장격인 이 최고의 존재감은 친박계(친 박근혜 전 대표)를 긴장시킬 소지가 다분한 만큼 자의든 타의든 당내 갈등을 부추기는 새로운 뇌관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여권 주변에서 ‘대북 특사론’ 등 이 최고의 역할론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4·29 재·보선 공천을 둘러싼 친이계와 친박계 간의 기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검찰발 사정정국이 본격화되면서 여권 내부에서도 ‘형평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최고의 귀국과 역할론을 둘러싼 논쟁이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또 다른 불씨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권 내 잠재적 차기주자인 강 전 대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강 전 대표는 2월 10일 연구재단인 ‘동행’을 발족한 이후 정치 외연을 차츰 확대하고 있다. ‘동행’은 강 전 대표의 정책 강화를 위한 정책모임으로 차기 대권을 겨냥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동행’은 3월 26일 여의도 사무실에서 대북정책 관련 첫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동행’의 한 관계자는 “매달 2, 4번째 목요일에 30명 안팎이 참석하는 조찬 세미나를 열고 매달 한 번은 ‘동행’ 소속 의원 44명을 포함해 각계 전문가 200여 명을 초청해 정책토론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강 전 대표도 정치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지난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강 전 대표는 올해 들어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정치인은 물론 관계와 재계 인사들까지 폭넓은 교류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활동 재개를 위한 본격적인 담금질에 돌입한 이들 세 사람과는 달리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여전히 칩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손 전 대표는 지난해 9월께부터 강원도 춘천 인근 대룡산 자락에 위치한 친척 농가에서 부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야인생활을 하고 있다.
일부 측근을 제외하고는 연락을 두절한 채 귀농생활에 전념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2월 9일 빈민활동 동지였던 고 제정구 전 의원의 추모행사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 게 전부다. 손 전 대표는 가끔 친분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 찾아오면 “때가 되면 복귀할 것”이라는 말을 넌지시 던진다고 한다.
칩거생활이 정계 은퇴를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니고 복귀 명분 및 분위기가 조성될 때 정치활동을 재개하겠다는 복심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