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는 DJ 아닌 창과 손잡길 원했다”
▲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후보의 단일화 서명식 현장. | ||
정가에서는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여의도를 떠났던 강 전 최고가 1년여 만에 자서전 출간을 통해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전 최고는 자서전에서 ‘차떼기는 국민회의 당시에도 있었다’고 털어놔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강 전 최고 측은 이에 대해 “책을 통해 과거 정치사에 대해 폭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책 속에 쓴 내용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이야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전 최고의 <열정의 시대>에 담긴 한국정치 이면의 비사들을 들춰보았다.
>>6·29 선언 전야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엔 역사가 퇴보할 뻔했던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있었다.당시는 1980년대 못지않은 격동의 시기로 수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6월 10일 5공 정권이 기존 5공화국 헌법대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선거를 강행하려 하자 시위는 더 거세지고, 급기야 군을 투입해서 진압하자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것.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는 육사 동기가 강 전 최고에게도 “도저히 안 돼 의정부에 있는 26사단을 투입한다.
완전군장을 해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을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 투입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강 전 최고는 청와대로 달려갔다고 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지만 안현태 경호실장을 통해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당시는 밤중이었는데도 주한 미국대사와 노태우 대표가 연이어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길로 청와대를 나온 그는 또다시 유혈충돌이 빚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군의 출동은 그날 밤에 저지되었다. 강 전 최고는 “미국 대사가 전두환 대통령과 군 출동에 관한 얘기를 한 뒤 노태우 대표를 불렀던 것 같다.
나 때문에 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역류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털어놨다.
>>DJP연대의 탄생
강 전 최고가 자민련 사무총장을 맡게 된 1996년. 김종필 총재(JP)는 사무총장이었던 김용환 의원을 부총재로 격상시키고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의 파트너를 삼아 DJP연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7년이 되자 당내에서는 낙선하더라도 대선후보를 내야 한다는 쪽과, 현실적으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혹은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와 연대해야 한다는 쪽 등 두 파로 나눠졌다.
강 전 최고위원은 “JP의 성향으로 보나 당 분위기로 보나 이회창 후보와 연대해 보수대연합을 구축함으로써 DJ에 맞서는 것이 정답이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양측의 문을 동시에 두드린 JP를 끌어안은 이는 DJ였다.
강 전 최고는 “당시 이회창 후보 측은 대선에서의 JP 변수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이 후보 측은 이미 구정치인의 이미지를 가진 JP를 부담스러워하면서 ‘JP가 없어도 당선되는데 굳이 왜 JP를 끌어들이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후보가 그해 대선에서 패배하고 5년 뒤 다시 대권에 재도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답답한 것은 당시 이회창 후보 쪽의 태도였다. 신한국당에서는 한편으로는 JP를 무시하는 듯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냉소적으로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JP는 그런 이 후보 측에 대해 불쾌해 했다. 반면 DJ 쪽에서는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JP는 그래도 끝까지 시간을 끌었다. 혹시 신한국당에서 어떤 사인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결국 신한국당을 포기해야 했다”고 밝혔다.
>>DJ 때도 차떼기 정치
1997년 12월 대선을 한 달 보름여 남겨두고 DJP연대가 성사되자 양당은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당보조금도 없고 후원회도 열 수 없었던 자민련으로서는 국민회의로부터 선거운동 비용을 받아 지원유세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강 전 최고는 “자민련 측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 국민회의로부터 받은 돈은 총 80억 원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 돈은 모두 현금이었다”며 “그만 한 현금을 받으려면 차떼기 외에 방법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 돈은 국민회의 측 사람과 만나 차 트렁크에 넣어 실어오곤 했다고 한다. 하루는 국민회의 측 한 인사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해 대낮에 그 집에다 차를 대고 돈을 실어왔다고.
여러 개의 더블백에 현금 10억 원을 넣어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는데 차가 거의 주저앉을 정도로 무게가 나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국민회의 측이 준 돈은 모두 1만 원권 지폐였는데 전부 헌 돈이었다는 점.
또 돈다발은 은행 띠지가 아닌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강 전 최고는 “우리는 그 현금다발을 당 계좌에 입금시키기 위해 은행으로 가져갔다. 기계로 세어보니 액수가 달랐다. 100장짜리라고 묶인 돈이 거의 다 한두 장씩 모자랐다. 누군가 고무줄로 묶으면서 슬쩍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그 와중에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 05년 9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대전시 당위원장으로 선출된 강창희 전 의원과 애기를 나누고 있다. | ||
2002년 대선이 있던 해에 열렸던 월드컵 당시, 한국-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가 대전으로 응원을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당 대전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던 강 전 최고에게 대전 월드컵경기장 입장권 10장을 구해놓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
국회의원에게 배정된 2장만 갖고 있던 그는 갑자기 10장이나 되는 표를 구할 길이 없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침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표를 사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통사정을 해 표를 뺐다시피 했다고. 그런데 막상 표를 구해놓자 이제는 거리응원을 하겠다며 ‘서대전시민공원으로 장소를 바꾸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 말에 강 전 최고는 당원들을 동원해 시민공원에 미리 자리를 잡고 공원 앞에 음식점을 찾아 예약까지 해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당을 바꾸라고 해서, 다시 삼겹살집에서 곰탕집으로 바꾸느라 북새통을 치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고 밝혔다.
헌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안전문제 때문에 다시 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응원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강 전 최고위원은 “월드컵 축구 응원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 해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후보가 현장의 상황에 맞추려 노력하기보다 현장을 후보의 사정에 맞추려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정력이 허비되었고 상황에 대응할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
그런 일은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일 때에 큰 실수로 이어진다. 그해 한나라당의 대선 준비상황과 병풍, 행정수도 공약 등 대선전에 발생한 각종 악재에 대한 대처능력은 모두 그날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