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달러’는 봉하로 갔나 북으로 갔나
검찰은 또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를 소환 조사한 데 이어 노 전 대통령까지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소환 시기 및 사법처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을 사법처리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노 전 대통령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이 150억 원대에 달하는 수상한 돈 거래를 한 사실이 밝혀졌고, 일부 돈 거래 과정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직접 연계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이 드러난 것 외에 또 다른 검은돈 거래 사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질 경우 이번 사건이 ‘노무현 게이트’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이 과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불행한 전철을 밟게 될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소환 조사가 임박하면서 그의 사법처리 여부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참여정부와 친노그룹 핵심 인사들을 줄구속하는 등 노 전 대통령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전방위적인 수사를 벌여온 검찰은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이 검은돈 거래 등 일부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을 잡고 혐의 입증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박연차 게이트’ 열쇠를 쥔 박 회장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잠갔던 입을 열기 시작했고, 노 전 대통령의 돈 거래 의혹을 풀어줄 또 다른 핵심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강금원 회장이 4월 9일 전격 구속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사면초가 신세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오랜 세월 든든한 후원자 내지는 정치적 동반자로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던 두 사람의 ‘입’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명운이 갈릴 수 있는 처지가 된 셈이다.
실제로 박 회장과 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참여정부 때 청와대 안방살림을 맡아왔던 정상문 전 비서관과 2007년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3자 회동을 갖고 노 전 대통령 지원 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등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의 수상한 돈 거래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150억 원대 돈 거래를 둘러싼 논란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이 두 사람의 검찰 진술이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의 사법처리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란 관측이다.
특히 박 회장의 심경 변화와 진술은 노 전 대통령의 명운을 가르는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및 가족들이 박 회장과 거래한 돈이 드러난 것만 75억 원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퇴임 직후인 2008년 3월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 원을 빌려줬고, 같은 해 2월에는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연철호 씨(노건평 씨 맏사위)에게 500만 달러(당시 환율로 50억 원 상당)를 건넨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말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통해 100만 달러(당시 환율로 10억 원)를 ‘청와대’로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4월 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을 통해 “부인이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고백하면서 이 돈의 규모와 인수자, 용처 및 노 전 대통령의 인지 시기 등을 둘러싼 논란도 증폭되고 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 박연차 회장에게서 빌린 15억 원은 사인 간의 거래로 보고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지만 박 회장이 연 씨에게 건넨 500만 달러와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전달한 100만 달러의 성격 및 실체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검찰은 특히 “100만 달러는 2007년 6월 말 청와대로 직접 찾아가 전달했다”는 박 회장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이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는 “노 전 대통령이 먼저 돈을 요구해 100만 달러를 가방에 담아 청와대에서 전달했다”는 박 회장의 진술을 확보하고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월 9일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게시한 사과문을 보고 권양숙 여사가 개입돼 있다는 주장을 처음 알았다”며 “차용증도 없고 박 회장은 ‘빌려줬다’는 식의 진술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검찰은 박 회장의 진술은 물론 청와대 출입기록, 돈을 주고받은 총무비서관실의 현장 사진까지 확보한 만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전달한 돈이 한화가 아닌 달러이고 2007년 10월 2~4일 평양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사정당국 일각에선 2차 정상회담 당시 박 회장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한 사실에 미뤄 이 돈이 박 회장 방북에 따른 대가성 내지는 정치권 주변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온 정상회담 커넥션 의혹과 연계돼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 부부가 아들 건호 씨 부부의 미국 유학비용 등에 사용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요구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 2007년 10월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 | ||
검찰은 또 박 회장이 ‘대통령의 조카사위’ 연 씨에게 전달한 500만 달러도 노 전 대통령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은 4월 6일 홍콩 당국으로부터 건네받은 박 회장의 홍콩 현지법인인 APC 관련 계좌 자료를 분석한 결과 박 회장이 차명 배당받은 6800만 달러 중 500만 달러가 조세피난처로 지목받고 있는 버진 아일랜드에 연 씨가 설립한 타나도 인베스트먼트에 송금된 사실을 확인하고 최종 목적지를 추적하고 있다.
검찰은 4월 10일 오전 연 씨를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박 회장에게서 500만 달러를 받은 경위 등 돈의 성격을 집중적으로 추궁한 뒤 12일 오전 일단 석방한 후 한두 차례 더 불러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연 씨에 이어 지난 12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도 전격 소환했다.
노 전 대통령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노건호 씨는 2007년 12월 연 씨와 함께 베트남 공장에서 박 회장을 만나 투자를 제안한 의혹을 받는 등 500만 달러의 실체를 규명할 핵심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다. 또 노 씨는 연 씨가 박 회장에게 받은 돈으로 세운 회사의 대주주라는 의혹과 노 전 대통령 부부가 박 회장에게 받은 100만 달러를 유학 비용 등으로 썼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의 돈 500만 달러가 연 씨에게 전달되기 전에 노 전 대통령 측의 요구가 있었다는 진술과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만큼 조만간 노 전 대통령 부부도 소환조사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가족들에게 건넨 600만 달러와 관련해 불순한 의도나 대가성 등이 입증될 경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흘러나오고 있다.
‘사과문’을 통한 노 전 대통령의 주장과는 달리 검찰이 청와대에서 10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박 회장의 진술과 정황을 확보한 상태고, 500만 달러 건도 노 전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연관성이 입증될 경우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포괄적 뇌물죄’는 명시적 ‘대가성’이 없더라도 포괄적으로 직무와 관련해 돈을 받았을 때 적용되는 것으로 직무범위가 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을 처벌하는 잣대로 활용된 전례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법원은 1997년 4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실형을 확정할 때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기업체가 기업 운영 편의나 정책결정상 선처 명목으로 대통령에게 제공한 금품은 대통령이 국정수행 과정에서 누리는 지위에 비춰볼 때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