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 이판사판 다 깐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9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사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심 깊은 표정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기습 ‘자복’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일단 ‘공무원’ 신분이 아닌 권 여사의 금품 수수 사실을 인정해 최소한의 법적 처분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여권 핵심부 연루를 거론하며 물귀신 작전을 펼 경우 이번 사건이 친노세력 와해에서 정치권 공멸의 이전투구로 비화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는 이제 바야흐로 이명박-노무현 전·현직 대통령 간의 자존심을 건 마지막 싸움으로 진화하고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과문’을 통해 검찰에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 ‘선방’의 타깃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일단 검찰의 수사 초점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교란작전으로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검찰은 저인망식으로 주변 측근들을 모조리 낚은 뒤 마지막에 노 전 대통령의 혐의 입증을 통해 극적인 수사 드라마를 만들려 했던 것 같다.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검찰의 수사 기조를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이실직고’를 해 주변 측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 정권과 ‘빅딜’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고구마 줄기 엮듯이 주렁주렁 측근 비리들이 매달려 나올 경우를 참을 수 없어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이는 검찰의 분위기에서도 읽힌다. 검찰은 애초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와 소환을 이번 사건의 하이라이트로 남겨둘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은 이에 대해 “(수사 순서가) 다 흐트러졌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특히 “(박연차 회장 관련 수사에서) 노 전 대통령 부분은 신중을 기해서 맨 마지막에 처리해야 할 사안이었다.대통령을 지낸 분이 (자신 때문에) 사법처리된다고 하면, 박 회장이 마음이 흔들려서 (정치인 등)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금품제공) 부분은 아예 입을 닫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이런 볼멘소리로 볼 때 일단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 선제공격이 먹혀든 것으로 볼 수 있다.검찰이 ‘피라미’를 여러 마리 대어와 함께 낚아야 ‘비리 완전 척결’이라는 수사 결과에 대한 체면이 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이라는 대어 한 마리만을 낚을 경우 ‘노무현 죽이기’라는 기획사정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달 30일 한나라당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금품수수의혹을 받고 있는 박진 의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 ||
벌써부터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를 들은 여권 핵심 일부는 ‘뜨끔했을’ 것”이라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설령 노 전 대통령이 여권 핵심 인사들을 걸고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치권에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고해성사 형식으로 낱낱이 까발릴 경우 현 여권 핵심도 그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진퇴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 전 대통령이 사과문 발표로 얻으려 하는 것은 동정여론의 확산과 여권과의 공동책임론 제기를 들 수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단 노 전 대통령이 이번 사건으로 제일 먼저 매를 맞는 정치인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박연차 게이트를 자신의 정치적 몰락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야 모두 흙탕물에 빠진 꼴이다. 향후 분명하게 여권 핵심 인사들도 거론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권력이 더 욕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권력이 더 비난을 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여권이 사과문 발표 초기 정국에서 매우 조심스런 반응을 보인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은밀한 노림수’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 거론된 노 전 대통령의 금품 수수 액수가 100만 달러 정도 선에서 끝나는 대신 만에 하나 여권 핵심 인사의 수수 액수가 몇 배를 넘길 경우 이는 누가 봐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비칠 가능성도 있다.한나라당의 한 주류 의원은 “칼은 칼집 안에 있을 때 효과가 있는 것이지, 일단 꺼내 들면 상대도 죽을 각오로 달려들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칼에 달려들어 자신을 찌른 셈인데, 이는 지지층을 결집하고 동정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에 대한 여론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사건 실체가 여권 핵심부도 연루된 쪽으로 흘러갈 경우 전직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은 청와대나 한나라당의 노 전 대통령 사법처리 여부에 대한 반응도 살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향후 검찰은 100만 달러의 성격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이 박 회장의 사업 확장에 대한 대가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해 동정론 확산을 확실히 차단할 가능성이 크다. 노 전 대통령 측은 1차 사과문 발표에 이어 서서히 반격의 전선을 넓히고 있다. 조카사위 연철호 씨가 긴급 체포되자 노 전 대통령 측은 “검찰이 사건을 냉정하게 보지 않고 과장되고 왜곡되게 바라보려 한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무리한 의도로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돈 거래를 모두 뇌물성으로 몰아가려 한다며 공격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선 “노 전 대통령은 맞을 매를 미리 맞았다. 지금은 아프겠지만 상처가 조금 아물게 되고 상황이 진정되면 반격의 모멘텀을 가질 것이다.
검찰이 그때까지 계속 노 전 대통령을 매질할 ‘꺼리’를 어떻게 찾는지에 따라 이번 ‘이명박-노무현’ 전쟁의 결말도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도덕성을 이미 상실한 노 전 대통령의 반격 날갯짓은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다 결국은 추락해 죽게 되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