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백기 들자 친노세력 봉기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정 전 비서관마저 구속되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항복’을 선언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지만 승부사인 노 전 대통령의 기질을 감안하면 일방적으로 ‘KO’ 펀치를 맞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백기투항 소식을 접한 친노세력들의 재결집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고 ‘정치보복’이라는 동정 여론이 꿈틀거리는 등 전직 대통령 소환을 앞두고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와 사정당국의 ‘음모론’을 감지하고 ‘정면 돌파’라는 최강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감추지 않고 있다. 사법처리 위기에 직면한 노 전 대통령의 감춰진 ‘방패’는 과연 무엇일까.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다.”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다.”
정상문 전 비서관이 구속된 다음날(4월 22일)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올린 글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제가 이미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저는 도덕적 명분을 잃었다.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있는 것 같다”고 언급해 인터넷 글을 중단하고 검찰 수사에 적극 응하겠다는 입장도 피력했다.
자신의 측근들과 참여정부 인사들을 타깃으로 한 사정당국의 전방위적 사정몰이에 가끔 인터넷을 통해 반박해 온 노 전 대통령이 사실상 백기투항을 선언한 셈이다. 후원자와 측근들이 줄구속되고 검찰의 칼날이 가족들을 위협한 데 이어 최후 방어선이었던 정 전 비서관이 청와대 공금 횡령 등 혐의로 구속되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게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 글을 통해 “그(정 전 비서관)는 저의 오랜 친구이고 저는 그 인연보다 그의 자세와 역량을 더 신뢰했다. 그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인데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느냐”고 언급했다. 정 전 비서관의 구속이 백기투항을 선언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자인한 것으로 풀이된다.이와 관련, 정치권 관계자들은 승부사인 노 전 대통령의 저돌적인 기질을 감안하면 백기투항 이면에 분명 ‘비밀병기’를 감추고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즉생’의 각오로 자신의 몸을 던져 위기정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나름의 승부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얘기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정치보복’이라는 동정론을 유도하는 동시에 친노그룹과 개혁세력의 재결집을 꾀하고자 하는 위험한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세상과의 소통 창구’로 강한 애정을 갖고 운영해 온 홈페이지 폐쇄를 선언한 대목에서는 침통함을 넘어 비장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현 정부 사정당국이 작심하고 ‘노무현 죽이기’에 ‘올인’하고 있는 만큼 인터넷을 통한 소극적 대응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는 각오로 정면 승부를 선택한 게 아니냐는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 법의 날 기념식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오른쪽)과 임채진 검찰총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일부 열성 지지층 사이에서는 “정권 차원에서 ‘노무현 고사 작전’을 전 방위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당할 재간이 있겠느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등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하면서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참여정부를 겨냥한 검찰의 거침없는 사정몰이에 한껏 몸을 낮춰왔던 친노 핵심 인사들도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노무현 구하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던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4월 23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것은 전임 대통령과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에 대한 모욕”이라며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는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조 교수는 선진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선진국이라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지도자가 있겠는가. 선진국에서 정치보복을 하지 않는 것은 국민들이 패를 나눠 싸우고 원한의 정치를 하게 될까봐 그 악순환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제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또 “이번 검찰의 수사는 다른 선진 민주국가에서나 지난 민주 정부 10년 동안 찾아보기 어려운 명백한 정치보복”이라며 “서면질의서를 보낸 것 자체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기보다는 혐의를 입증할 만한 자신이 없으니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전 비서관의 구속과 관련해서는 “기존 비서관들의 비리와는 구분이 돼야 할 것이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옆에서 참모가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일을 했을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권력형 비리가 아닌 ‘생계형 비리’에 초점을 맞춰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노무현의 복심’으로 불리면서 친노세력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4월 2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 부부와 오찬을 함께하는 등 검찰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한껏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노 전 대통령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진국 전 청와대 법무실장 등 과거 참모진도 속속 변호인단에 합류해 검찰과의 진검승부에 대비하고 있다.
친노세력의 재결집 움직임과 친노 핵심 인사들의‘노무현 구하기’ 행보는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전후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고, 사법처리 여부에 따라서는 조직적인 반발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정치권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음모론’도 노 전 대통령의 정면 승부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민정팀을 주축으로 사정당국이 참여정부를 겨냥한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온 결과 전직 대통령이라는 ‘대어’를 낚을 호기를 잡자 여권 핵심부와 검찰 수뇌부가 노 전 대통령의 소환 및 사법처리를 놓고 막후 조율을 거듭하면서 ‘노무현을 식물인간으로 만들려 한다’는 게 음모론의 핵심이다.예측불허의 초박빙 승부가 예상되는 재보선 정국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국정 드라이브와 맞물린 정국 주도권 장악 차원에서 ‘노무현 게이트’를 장기화시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청와대와 임채진 검찰총장이 핫라인을 구축하고 노 전 대통령 문제를 조율하고 있을 것이란 의혹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소환 시기가 자꾸 지연되자 문재인 전 실장이 4월 24일 검찰 측에 조기 소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음모론’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황들을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재판을 유도하는 정황이 감지되고 있는 만큼 검찰과 여권의 전략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고 정면 승부하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역설적인 ‘백기투항’ 선언으로 검찰과의 정면 승부를 선택한 노 전 대통령이 숨겨둔 ‘승부수’는 과연 무엇일까. 또 ‘대어’ 사냥을 목전에 둔 검찰은 대체 어떤 ‘카운터펀치’를 준비하고 있을까. 엄청난 정치적 파장과 거센 후폭풍을 동반한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의 전면전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