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초조해하는 쪽이 진다’ 빙긋
▲ 친이 측의 ‘김무성 원내대표안’을 거절한 박근혜 전 대표의 속내엔 차기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있다.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모습 뒤로 김무성 의원이 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조기 레임덕에 빠질 이 대통령이나 언젠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친이그룹과 동행하지 않아도 집권할 수 있다”는 박 전 대표의 강한 자신감이 이번에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친이그룹의 러브콜을 매몰차게 외면하면서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박 전 대표의 대권 로드맵을 분석해보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이 써낸, 4·29 재보선 참패에 대한 ‘반성문’을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반성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무성 의원의 원내대표 추대안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그동안 당내에서 낭인 취급을 당했던 친박그룹을 처음으로 배려하는 정치적 양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 박 전 대표의 존재 자체를 정치적 종속변수이자 ‘아랫사람’으로 규정해오던 이 대통령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의도 정치에 관한 한 언제나 마뜩치 않게 생각해오던 이명박 대통령이 4·29 재보선 참패 뒤 박희태 대표와의 회동에서 “선거(재보선 참패)는 이번에 우리 여당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며 자신의 몸을 바짝 낮춘 것을 상당히 이례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이번 선거에서 친이 주류와 박 전 대표 진영 간의 분열이 참패의 원인이고 그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국정을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인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향후 대 친박그룹 전략에 대폭 수정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안’ 수용은 이 대통령 인식 전환의 첫 번째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대통령의 ‘진정성’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 대통령이 불과 며칠 사이에 그동안 취해왔던 친박그룹에 대한 ‘고집’을 꺾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반응이 압도적이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4·29 재보선 패배로 촉발된 ‘봉기’ 수준의 당내 반란을 최대한 눌러놓아야 원활한 국정 운영과 함께 조기 레임덕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이 대통령의 ‘양보’는 진실한 화해가 아닌,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얄팍한 잔꾀라는 것이다.
친박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재보선에 참패한 뒤 불과 며칠 사이에 이 대통령은 김무성 의원에 대한 원내대표 추대안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당내 분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진심으로 친박그룹을 배려하려 했다면 좀 더 ‘소통’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정말 진정성이 있었다면 친박그룹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심지어 박 전 대표도 ‘김무성 카드’안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런 무책임한 이 대통령의 행보를 박 전 대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이런 이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결국 김무성 카드를 단박에 차버린 것으로 표출됐다. 그가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을 반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급조한 것이 뻔해 보이는 김무성 카드를 거절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더 큰 양보안을 요구하는 압박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박희태 대표는 자신이 주도한 김무성 원내대표안을 포함한 쇄신작업이 박 전 대표에 의해 ‘거절’당하면서 소장파에 의해 조기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친이계 한 중진의원은 “‘김무성 카드’가 날아가 결국 한나라당이 ‘두나라당’으로 가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몽니’가 분당론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화합을 통해 안정적인 제2기 국정 운영을 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물 건너가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분란 사태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국정을 책임진 이 대통령으로서는 어떤 경우에든 판을 깰 수는 없다. 이번에 김무성 카드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가 계속 비협조로 나올 경우 이 대통령으로선 그보다 더 강한 타협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대통령이 향후 10월 재보선이나 내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 ‘분권’ 등을 물밑으로 보장해 박 전 대표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 대통령이 분당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각오하지 않는 이상 재보선 참패 정국은 박 전 대표의 판정승으로 끝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에 박 전 대표가 김무성 카드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대권 전략 일단을 보여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박 전 대표로서는 김무성 의원이 이번에 원내대표가 될 경우 내년 지방선거까지 이 대통령과 한배를 탈 수밖에 없다. 공동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동안 계속 박 전 대표 측은 “전면에 나설 시기가 아니다”라며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방관자적 태도를 취해 왔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는 적어도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계속 이 대통령과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대권 전략을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번 김무성 카드 거부는 대권 후보로서 박 전 대표의 ‘커밍아웃’ 시기가 지방선거 이후에도 계속 늦춰질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의 이번 ‘몽니’는 친박그룹의 독자적 힘으로 대권을 쟁취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조기 레임덕에 빠질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 있다. 또한 ‘친목단체 수준’(정몽준 최고위원 표현)의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는 여당 주류, 특히 친이그룹은 이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과 함께 모래알처럼 흩어져 공중분해될 것을 예상하고 계속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박 전 대표 측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앞으로 이 대통령은 여권 핵심 인사들의 잦은 비리 연루 의혹과 여권 주류의 내분 등으로 계속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때 재도약의 추진체를 친박그룹과의 화합을 통해서 만들고자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번 재보선 참패로 ‘연대’ 필요성 시기가 앞당겨진 셈이다. 하지만 가만 놔두고 있으면 저절로 힘이 빠질 것인데 굳이 도와주려다 같이 진흙탕에 빠질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 전 대표가 김무성 카드를 거절한 배경에는 ‘자기정치를 고집하는 김 의원 자체에 대한 불신’도 깔려 있다는 색다른 해석도 나온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김무성 의원은 박 전 대표를 ‘보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사람 다음이 나라거나 경우에 따라 내가 (보스가)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들이 자주 나온다. 김 의원이 최근 사석에서 “박 전 대표는 훌륭한 대통령감이지만, 민주주의적 소양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당내에 떠돌아다닌다.
정치권에선 김 의원이 이상득 의원과 올해 초 ‘화해골프’를 하는 등 개인적으로 매우 가깝고, 연말 한나라당 지도부 요청에 따라 의장 직권상정 요청을 추진하는 등 친이세력에 적극 협조한 사실 등이 김 의원의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 의원으로서는 박 전 대표가 뜻하지 않게 대권 레이스에서 낙마할 경우 친박그룹을 대표하는 주자가 바로 자신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박 전 대표의 강경 일변도와 달리 ‘화해’라는 제3의 길을 내세우는 자신의 정치적 상품성도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는 친박그룹의 몇몇 핵심 관계자들은 ‘김 의원이 순수하게 박 전 대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계속 ‘위’에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이명박 캠프 핵심 관계자 표현) 박 전 대표와 절대 손잡지 않을 것이다. 기업가적 발상이 몸에 배 있어 효율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박 전 대표를 언제나 걸림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박 전 대표는 정치를 잘 알기 때문에 절대로 이 대통령과 손잡지 않을 것이다. 퍼스트레이디까지 경험했던 그로서는 변절과 배신의 정치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절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권력의 일부를 내놓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김무성 카드’는 두 사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불신을 접합시키기에는 그 접착력이 너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과연 다음에 어떤 카드로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할지 두고 볼 일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