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최경환 ‘의리와 믿음’으로 친박 외길…친박 떠난 김무성·유승민이 ‘친박 입문’은 선배
공교롭게도 ‘원조 친박’으로 불렸던 이들 모두가 요즘 정치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서청원 최경환 의원은 자유한국당에서 출당 대상으로 꼽혀 자칫 당적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유승민 김무성 의원은 친박에서 반박으로 함께 돌아서 바른정당의 ‘창업 동지’가 됐다가 지금은 이혼 직전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 서 있다.
원조 친박들의 위기 탈출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앞을 내다보려면 지나온 날부터 잘 살펴봐야 하는 법. 그래서 미래학자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을 가장 해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원조 친박들이 걸어온 길이 어땠는지를 되짚어봤다.
최경환 의원과 서청원 의원. 박은숙 기자
#처음부터 끝까지 친박, 서청원 최경환의 운명은?
‘친박 거두(巨頭)’라 할 수 있는 서청원 의원은 자신의 출당을 요구하고 있는 홍준표 대표에 대해 “홍 대표가 떠나라”고 받아치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못 나간다는 얘기다. 그의 결기는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서 의원이 친박이 된 것은 200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선 후보 경선을 치를 때부터였다. 그는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며 박근혜 캠프로 갔다.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로 무너졌던 당을 박근혜 의원이 대표를 맡아 살렸기에 박근혜를 돕는 게 ‘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선 캠프에서 상임고문을 맡았다.
친박의 시작이 2007년이었다면 그가 친박계에서 확실하게 ‘주전 자리’를 꿰찬 것은 2008년 18대 총선 때였다. 당시 당의 주류를 형성한 친이(친 이명박 계)가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키자 그는 이에 격분,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유명한 말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살아서 돌아오라”는 발언에 힘입어 친박연대는 14석(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을 차지하는 대이변을 낳았다.
서 의원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옛정’을 잊지 않은 박 전 대통령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서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어 공천이 어려웠지만 2013년 경기도 화성갑 보궐선거에서 공천장을 받았고 이후 박근혜 정부 내내 친박계 좌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 의원은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81년 11대 총선 때 민한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12대 총선(1985년)에서 김대중·김영삼 양김이 만든 신민당 돌풍에 밀려 낙선한 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대변인과 총재 비서실장 등을 맡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이 됐다. 김영삼 정부 때 정무1장관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 등을 지냈다. 서 의원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정통 야당 출신 정치인답게 의리를 매우 중요시한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한번 맺은 인연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서 의원은 1998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인으로 변신할 때부터 박 전 대통령을 지켜봤다. 당시 당 사무총장으로서 공천장을 박 전 대통령에게 준 사람이 서 의원이었다. 서 의원의 부인은 달성군으로 가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런 인연을 중요시 여겨 2007년 이명박·박근혜가 맞붙은 당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쪽으로 갔다. 그의 정치적 어른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서 의원에게 이명박 전 대통령을 도우라고 했지만 그는 의리를 버릴 수 없다며 ‘어른의 요청’도 뿌리치고 박근혜 캠프로 향했다.
서 의원과 함께 역시 탈당 권유 대상에 들어간 최경환 의원도 “승복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홍준표 대표의 요구가 이치에도 맞지 않고 보수의 재건에도 역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최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본격적 친박의 길로 들어선 서 의원과 비교하면 ‘친박 입문’이 더 빠르다. 2004년 국회에 들어온 최 의원은 2005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친박이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07년 대권도전을 꿈꾸면서 당 안팎의 인물을 모았는데 이때 최 의원은 경제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문 그룹이 됐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경제관료로 일했던 그는 초선 의원이던 2007년 한나라당 당내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다. 초선 의원으로서는 요직이었다. 최 의원은 탁월한 성실성으로 박 전 대통령의 인정을 받았고 두루두루 인간관계도 좋아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아도 그를 시기하는 ‘정적들’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가치는 쑥쑥 올라갔고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경선에서 지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먼저 갔지만 최 의원은 친박계로는 거의 유일하게 이명박 정부의 장관(지식경제부)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최 의원만큼은 예외로 뒀다.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가 최 의원이라는 의미였다. 최 의원은 2012년 대선 때는 선거대책본부에서 요직을 맡기도 했고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5월 집권여당의 원내대표에 올랐다. 뿐만 아니었다. 2014년 7월 대한민국 경제를 지휘하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면서 승승장구했다.
최 의원을 잘 아는 최 의원 지역구의 한 원로는 “정부 여당 시절 야당 의원의 요청도 귀담아듣고, 메모한 뒤 가능한 사안이면 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해주는 정치인이 바로 최경환이다. 도농복합지역인 자신의 지역구에 가면 농사짓는 노인들의 얘기까지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다. 사심 없이 열심히 했는데 박 전 대통령 탄핵 파면·구속 수감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박근혜를 빨리 지우고 새 출발을 하려는 자유한국당의 현재 입장도 잘 알지만 오랜 세월이 걸려 크게 자란 정치 인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유승민 의원과 김무성 의원. 박은숙 기자
# 친박에서 반박으로 배 갈아탔던 김무성 유승민은?
친박이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떠나 바른정당을 창업하며 동지의 길을 걷게 된 김무성 유승민 의원도 이야기를 펼쳐놓으면 책 한 권은 될 만한 이력을 갖고 있다. 친박 동지에서 다시 반박 동지로, 바른정당 공동 창업주가 됐다가 이제는 결별 초읽기에 들어간 ‘원조 친박’ 유승민 김무성 의원의 스토리도 그야말로 일부러 쓰려고 해도 써내려가기 힘든 묘한 인연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서청원 최경환 의원 얘기부터 시작했지만 유승민 김무성 의원이 친박으로 따지면 더 선배다. 둘이 ‘친박’으로 뭉치게 된 인연은 2002년 대선 즈음이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최측근이었던 이들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시작하면서 훗날 친박으로까지 인연이 발전했다. 상도동계 출신인 김 의원은 당시 이회창 후보의 비서실장이었고, 당시 마흔네 살의 젊은 경제학자였던 유 의원은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2002년 대선 재수에 나선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석패하면서 이들은 보다 강한 후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 답은 박근혜였다. 유승민 김무성 의원은 2005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뭉쳤다. 김 의원은 당 사무총장으로, 유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당 대표를 사퇴한 2006년부터는 두 사람 모두 당직을 버리고 대선캠프에서 일했다. 이들에게 원조 친박이라는 닉네임이 붙는 이유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2007년 8월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유승민 김무성 의원은 이때부터 자주 길이 엇갈리게 된다. 김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중 당시 친이계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가 되면서 박근혜 식구 명부에서 제외됐다. 이후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선 캠프의 총괄본부장을 맡으면서 다시 ‘친박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당 대표를 하던 지난해 4·13 총선 때 친박계가 일으킨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다시 틀어지기 시작했고 김 의원은 결국 최순실 사태가 터지자 박 전 대통령과는 완전히 적대적 관계가 됐다.
김무성 의원의 친박 행보에 다소 굴곡이 많았던 반면, 유 의원은 2007년 박근혜 후보의 경선 패배 후부터 박 전 대통령과의 거리를 서서히 두기 시작했다. 유 의원을 국회의원의 길로 이끌어준 것이 박 전 대통령이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전 대통령 밑에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비서실장까지 했지만 ‘쓴소리’를 자주 하며 유 의원은 친박 대열에서 자꾸만 멀어져갔다.
유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 앞서 당명을 바꾸고 당의 색깔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꿀 때도 대놓고 반대 목소리를 냈을 정도로 공개적으로 박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워왔다.
박 전 대통령의 권위가 여전히 살아있어 박 전 대통령 특유의 ‘레이저 눈빛’이 여전히 먹히던 2015년 유 의원은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됐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청와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유 의원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직격탄을 날린 데 이어 세월호법 시행령 개정을 위한 국회법 개정을 원하는 야권에 동의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유 의원을 향해 ‘배신의 정치’라는 분노의 발언을 쏟아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시기는 다소 달랐지만 ‘완전한 반박’이 돼 바른정당을 창당한 유·김 두 의원은 이제 또다시 헤어질 형세다. 김 의원은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통합파의 중심이 됐고, 유 의원은 독자생존이 살길이라는 자강파의 리더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지금 진보 진영에는 사람이 많다. 젊은 사람도 그렇고, 경륜이 많은 노장도 그러하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그렇지 못하다. 어렵게 키운 정치인을 너무 하찮게 보는 경향 때문이고 정치인 스스로도 자기 지지력이 약해 너무 쉽게 뒤안길로 사라진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정치인, 그리고 정당한 노력을 인정해주는 정치적 토양이 만들어져야 한다. 보수 정당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갈등도 우리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로 활용해야한다”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