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반쪽 게이트’ 여의도 몰아친다
민주당은 특검과 국정조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뿐만 아니라 여권 실세들도 대거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박연차 게이트’를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며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검찰이 결과적으로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만큼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그에 버금가는 수사를 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여권 인사들에 대해 유독 약한 사정 메스를 들이댔던 검찰의 칼날이 여권 심장부를 정조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살아생전 승부사로 통했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의 승부수’가 이명박 대통령과 살아 있는 권력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 빗물인지 눈물인지 지난 24일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비를 맞으며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고사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여권의 분위기와 우려를 잘 대변하고 있는 고사인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승부수로 여권에 정치보복 중단 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5월 23일 자살을 결행하기에 앞서 “너무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검찰의 무차별적 수사로 인한 극심한 심적 고통과 정신분열 현상이 노 전 대통령을 끝내 자살로 몰고 갔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으로 친형인 노건평 씨와 측근들이 ‘줄구속’된 데 이어 자신은 물론 부인과 아들 딸까지 검찰의 사정 가시권에 들어오자 도덕적 상처와 심리적 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물론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640만 달러를 건넨 사실이 드러난 만큼 검찰이 이 돈의 실체 및 노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를 파헤치는 것은 실체적 진실규명을 위한 당연한 검찰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 참여정부 인사들을 겨냥한 검찰의 사정 강도와 현 여권 실세들을 상대로 한 검찰 수사 수위가 확연한 차이를 보이면서 표적·기획 수사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는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배경을 둘러싼 검찰권 행사 논란이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해 가족과 측근들을 소환조사하면서 이 중 상당수를 이미 사법처리했다. 반면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된 여권 인사는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이 유일하고, 여권 로비 몸통으로 지목받고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에 대해선 세 차례나 소환 조사하고도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소환(4월 30일)한 뒤에도 사법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가족들에 대한 보강수사를 명분으로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의 도덕성과 청렴성에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검찰은 박 전 회장의 돈 40만 달러가 노 전 대통령 측에 전달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는 등 돌발 변수가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를 지연하게 된 배경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 언급했듯이 가족들을 향한 검찰의 무차별적 수사로 인한 심리적 중압감이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는 점에서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친노 그룹의 한 관계자는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최고 권력자의 주머니를 퇴임 후에 뒤졌을 때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노 전 대통령이 이권에 개입한 것도 아니고 오랜 후원자로부터 가족들의 생계와 관련해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을 검찰이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던 게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며 검찰 수사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 씨의 미국 주택 매입 의혹 등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등 가족들을 상대로 고강도 저인망식 수사를 벌인 배경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보낸 바 있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검찰 수사 결과 설사 노정연 씨가 차명으로 주택을 소유했고, 드러난 돈 외에 추가로 비용이 들어간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수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의견이 우세했다. 박연차 전 회장이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한 100만 달러의 경우처럼 노 전 대통령이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검찰이 부인과 아들에 이어 딸까지 압박해 노 전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려 ‘백기투항’을 유도하고자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했든, 아니면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든 이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로 논란의 핵심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몰고 올 후폭풍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박연차 게이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여부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만큼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건은 ‘공소권 없음’ 처분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문제는 천신일 회장 등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여권 인사들에 대한 수사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충격에 빠진 검찰은 천 회장을 비롯해 검찰 소환이 예정된 정·관계 인사들에 대해 서둘러 조사를 마치고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조기에 종결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불러온 검찰의 편파·기획수사 논란이 거세지면서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성역 없는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을 경우 정치권은 또 한 번 거센 사정광풍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의 편파·기획수사 의혹을 주장해 온 민주당 등 야권은 검찰이 천 회장을 비롯해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여권 인사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수사 결과물을 내놓지 못할 경우 특검과 국정조사를 실시해서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국민 여론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하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된 것은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겠지만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수사 방식도 지탄받아 마땅하고 이에 동조한 여권 핵심부도 일정부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노사모 홈페이지와 인터넷에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의 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봉하마을은 노 전 대통령의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친노 그룹과 진보 진영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노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제2의 ‘노풍’을 일으켜야 한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될 조짐이 일면서 검찰 수사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특히 천 회장에 대한 수사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이자 여권 실세로 통하는 천 회장은 ‘박연차 게이트’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의 경선 및 대선자금에도 깊숙이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 원을 대납한 것을 비롯해 대선이 열린 2007년 자사 주식을 집중 매각해 300억여 원을 조성했고, 이 과정에 이 대통령의 일부 측근들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검찰은 천 회장을 수사하면서 ‘대선자금은 수사 대상이 아니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초래할 정도로 ‘죽은 권력’에 대해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 수사를 전개해 온 검찰이 ‘대통령의 친구’인 천 회장과 여권 실세들에 대해서는 용두사미식 수사로 마무리할 경우 더 큰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을 정조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야권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획사정’ 의혹에 대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관계자들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등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과 ‘소통’해온 것으로 알려진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 대한 소환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5월 23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마당에 보복사정과 박연차 구명 로비 의혹을 규명할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전직 국세청장을 소환하지 못한다면 검찰 스스로 기획수사임을 자인하고 여권 핵심부 또한 ‘박연차 게이트’에서 떳떳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검찰과 여권이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이유로 사건을 대충 마무리할 경우 거센 역풍을 맞고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의 승부수’가 천 회장 수사를 넘어 여권 심장부를 정조준하고 있는 형국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 <삼국지>의 고사처럼 죽은 노 전 대통령이 살아있는 권력에게 던진 메시지가 향후 검찰 수사와 정국 풍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민적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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