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증’ 진단받고 ‘응급약’만 만지작
▲ 이명박 대통령이 경복궁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서 헌화한 뒤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 대통령의 ‘조문 정국’ 수습책은 검찰 지휘 라인의 ‘정리’와 민주당과의 적극적 대화 등으로 압축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는 “그런 기능적 미봉책으로는 갈기갈기 찢긴 민심을 보듬어 안을 수 없다”라고 지적한다. ‘노무현 블랙홀’에 빠진 이명박 대통령. 그는 과연 어떤 탈출 카드를 꺼내들게 될까.
현재 여권은 국정주도세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지리멸렬해 있는 상태다. 어찌 보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거의 없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암흑의 동굴 안에서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 상황을 인식하는 시각과 대책 방법 등은 여권에 퍼져 있는 계파만큼이나 다양하고 중구난방이다.
한나라당의 대부분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자체에 대해 “앞일이 걱정이다”라는 공통된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 누구 하나 민심 수습책이나 대책 마련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청와대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 뒤 최대의 위기 변곡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170석이라는 든든한 지원군과의 협동체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현재의 양두마차 바퀴는 따로 돌 뿐이다. 이런 당·청의 ‘엇박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조문 정국을 탈출하기 위한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현재 당과 청와대 사이의 보고 라인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에게 ‘당심’을 보고하는 채널이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득 의원과는, 경주 재선거에 패배한 뒤부터 사람들이 다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렇다고 박희태 대표가 청와대에 가서 편하게 당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와대 정무라인 역시 우리(당 지도부)와 특정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당·청 간의 벽과 불신 때문에 당 내부는 ‘청와대 혼자 어디 잘 해봐라’며 점점 뒷짐 지고 비꼬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당·청 간의 ‘불통’만이 위기 탈출이 필요한 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니다. 이명박 정권을 지키던 ‘집토끼’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특히 현 정권 창출에 도움을 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대통령의 일방주의식 독주에 등을 돌리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등의 요직을 거쳐 권력 메커니즘 읽기에 밝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현 정국 돌파 카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부터 쳤다. 그는 “나에게 그런 것 묻지 말라. 정국 수습 생각해봐도 어차피 들어주지도 않는다. 대통령이나 청와대 종사하는 사람들과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아서 수습책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굳이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캠프 관계자도 “나도 현 정권에 신경 쓰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 대통령의 리더십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보수중도세력의 안착에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안타깝다. 이 정권은 ‘어떻게 되겠지 정권’ 아닌가. 아무리 잘못됐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 기대도 접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이 대통령의 현 서거 정국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앞서의 윤 전 장관은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언론계 인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분들은 ‘이 대통령이 이번 사태에 대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는 말을 하더라. 상황인식이 다르면 그 처방전도 달라지는 것 아닌가. 향후 여권의 돌파책도 검찰 수사 라인에 대한 책임 묻기 등과 같은 기능적인 측면에 그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당·청 간 불통, 집토끼의 탈출 움직임, 이명박 대통령의 ‘안이한’ 시국 상황 인식은 현 여권이 남은 집권 기간 동안 계속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각계각층에서는 이 대통령에게 서거 정국 탈출책을 쏟아내고 있다. 먼저 이 대통령 스스로 국정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다시 해야만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의견이 많다. 앞서의 윤여준 전 장관은 이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은 지금까지 이 대통령이 겪은 정치적 갈등과는 완전히 다른 사건이다. 이것은 지능적으로 접근해서는 절대 풀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상당히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해법이 나올 것이다. 정책도 근본적인 문제가 정립이 돼야 나오는 것이고, 국정운영의 방식도 정립이 되는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 여권 ‘황색 주의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가 5월 29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당 주변의 이런 대대적인 쇄신 주문은 이 대통령 앞에서 ‘무장해제’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서거와 현 정권의 국정 운영 기조는 별개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청와대 분위기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의 패닉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일부에선 내각 총사퇴나 사정라인의 대대적 문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청와대 기류는 여전히 미온적인 것으로 안다. 내각 쇄신은 장관직무평가에 맞춰 부분적으로 교체를 할 것이며,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도 이 대통령이 어떠한 형태의 대국민 메시지도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일부 강경파들을 중심으로 ‘원칙수사를 하다가 생긴 불행한 일’이라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주류는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제2의 촛불 정국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소장파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로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 이명박’ 세력이 총결집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지만 여권 주류는 이에 대해 “그 가능성이 낮다”며 평가절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민장 이후 민주당을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한 청와대의 정치적 책임론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특검을 주장할 것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야당에서 미디어법 처리와 연계해 천신일 회장 등과 관련한 특검을 요구할 것으로 본다. 만약 그것을 받게 되면 천 회장과 관련한 대선자금, 그리고 여권 핵심 인사 이야기가 줄줄이 나올 것인데 그것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일 거리에 시위가 난무하게 되고 현 정권으로서는 큰 부담이 된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여권이 하루빨리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탈출해 북한 핵실험 정국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정라인에 대한 과감한 처리가 있어야 하는데 청와대가 수사가 끝나고 나서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난감해진다. 현재로선 북핵 정국이 이 대통령에게 그나마 굴러들어온 ‘행운’인데 이것마저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향후 정국 운영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여권을 향해 “이 대통령이 ‘노무현 역풍’에서 헤어나는 길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라도 그를 보듬어 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살기 위해 죽은 노무현 패러독스’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