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흥청대다 5개월 새 ‘홀쭉’
▲ 매일 성대한 파티가 벌어졌던 ‘라이 클럽’. 최근 금융위기 여파로 이곳의 주고객인 올리가르히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 ||
모스크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이트 클럽 가운데 하나인 ‘라이클럽’. 올리가르히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는 매일 밤 성대한 파티가 벌어진다. 젊고 아름다운 댄서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테이블 위에는 손님들이 주문한 값비싼 보드카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다. 클럽을 자주 찾는 단골 중에는 세계 최대 니켈 생산업체인 ‘노릴스크 니켈’의 미하일 프로코로프 회장도 있다.
반면 미처 테이블을 잡지 못한 손님들은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면서 클럽 밖에서 하염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라이클럽의 이런 화려한 시절도 이젠 과거가 됐다. 지금은 클럽의 반 이상이 텅 비어 있는 날이 허다하며,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언제든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밤 북적대던 이곳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텅 비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주고객인 올리가르히들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설령 기존의 고객들이 클럽을 찾는다 해도 씀씀이가 예전만하지 때문에 매출이 형편 없긴 마찬가지다.
라이클럽의 사장은 “현재 클럽을 찾는 고객들에게 테이블당 30%씩 할인을 해주고 있다”며 울상을 지었다. <포쿠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전에는 고객들이 샴페인을 병째 주문하곤 했다. 예를 들어 한 병에 3000달러(약 400만 원) 하는 돔페리뇽 샴페인 가격도 묻지 않고 선뜻 주문하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억만장자 손님들도 메뉴판을 꼼꼼히 훑어본 후에야 주문을 한다. 더러는 값을 깎아 달라며 흥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클럽 사장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라며 불경기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이블당 적게는 2300달러(약 300만 원)에서 많게는 1만 2000달러(약 1600만 원)를 지불했던 예전과는 달라져도 한참은 달라진 풍경이라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승승장구했던 올리가르히들이 이렇게 지갑을 닫게 된 것은 원자재 값 하락이나 금융 위기 등으로 보유하고 있던 회사의 지분가치가 말 그대로 ‘반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반토막’이면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다. 러시아의 경제주간지 <스마트 머니>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최대 부호인 올레그 데리파스카(40)의 경우 순재산 280억 달러(약 31조 원)보다 4억 달러(약 5000억 원) 더 많은 무려 284억 달러(약 37조 원)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철강업체 ‘메탈로인베스트’의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회장(55) 역시 이번 금융 위기로 자신의 순재산 93억 달러(약 12조 원)보다 더 많은 무려 144억 달러(약 19조 원)를 잃었다.
▲ ‘첼시 구단주’ 아브라모비치 | ||
지금까지 개인재산이 10억 달러(약 1조 3000억 원) 이상인 <포브스>의 갑부 명단에 이름을 올린 러시아 갑부들은 전체 1125명 중 87명이었다. 하지만 러시아판 <포브스>의 편집장은 “내년에는 이들 상당수의 이름을 명단에서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억만장자 기업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현금을 보유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자사의 유가 상품들을 헐값에 매각하거나 보유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들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파는 경우도 눈에 띄게 늘었다.
당연히 세월 좋게 고급 레스토랑을 드나들거나 명품 쇼핑을 하는 호화로운 모습도 줄었다. 가령 예전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던 모스크바의 ‘푸쉬킨스’ 레스토랑의 경우 그 명성이 무색할 만큼 한가해졌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올리가르히의 몰락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 역시 올리가르히인 알렉산드르 레베데프(48)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이번 위기가 어쩌면 러시아의 부정부패를 청산할 아주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얼마 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 집권당에 반하는 새로운 정당인 ‘러시아 민주당’을 창당한 그는 이번 금융 위기로 자신의 재산 31억 달러(약 4조 원) 가운데 반을 날려 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사실 러시아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주가 폭락과 같은 경기 침체가 아니다. 진짜 위기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경제 시스템이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기업인들의 부정부패가 깨끗이 사라질 좋은 기회다. 값비싼 제트기를 눈물을 머금으며 매각하거나 벤틀리 리무진을 유지할 능력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팔아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과연 이번 금융 위기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경제에 오히려 약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싶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