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폭력도 사랑이었다.
▲ 미국에서 청소년 이성교제시 발생하는 폭력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거울 속 인물은 조슈아 빈(왼쪽)과 그에게 살해당한 헤더 노리스. | ||
2007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헤더 노리스가 사지가 절단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려진 채 발견됐다. 여러 곳의 쓰레기통에 나뉘어 버려진 까닭에 그녀의 시체는 전부 발견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참혹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연쇄살인범도 정신이상자도 아닌 바로 노리스의 남자친구였다.
한없이 달콤한 사랑을 나눠야 할 젊은 연인에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노리스는 고등학생이던 17세에 조슈아 빈(24)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노리스의 어머니에 따르면 평범했던 이들의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노리스는 남자친구가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즉각 받아야만 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났다. 평소 명랑했던 소녀는 남자친구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를 견디지 못한 노리스는 관계를 끝내려고 몇 차례나 시도 했고 결국 남자친구를 구타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10대에 시작된 노리스의 철부지 사랑은 살인이라는 비참한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해 9월 유죄가 확정된 빈은 법정 최고 징역형인 68년 형을 선고받았다.
미국 내 10대의 이성교제에 얽힌 폭력사건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3년 텍사스에서는 오트랄라 모슬리(15)라는 소녀가 학교 복도에서 남자친구의 칼에 찔려 사망했는가 하면, 2001년에는 제니퍼 앤 크레슨트(18)라는 소녀가 남자친구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처럼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자 미국에서는 청소년의 이성교제 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관련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등 예방 및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텍사스에서는 각 지역교육청에 학생들의 교제 중 발생하는 폭행에 관한 규정을 학교안전조례에 포함시키도록 했다. 로드아일랜드에서도 한 젊은 여성이 10대 때 사귄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13세 이상에 대해 남녀가 사귀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학대와 폭행에 관한 교육을 의무화하는 ‘린제이 앤 버크 조례’를 마련했다. 뉴욕시도 청소년 교제 시 발생하는 폭력문제를 가정법원에서 간소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2007년에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10대 폭행 응급전화와 웹사이트가 문을 열었으며 각종 청소년 관련 단체들도 상시 상담이 가능한 각종 온라인 상담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10대들의 이성교제에서 폭력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뉴욕시의 한 연구기관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연구가 시작된 1999년 이후 10대의 교제 중 발생하는 폭행이 40%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결과에는 설문 대상 청소년 1만 5000명 중 약 10%가 이성친구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8%는 성행위를 강요당한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 10대들의 임신율도 높아지고 있다. | ||
풋풋하고 아름다워야 할 10대의 사랑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원인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한 심리학교수는 “청소년기의 소년들은 이성을 대할 때 ‘마초’의 모습을 동경하며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지나치게 많은 문자 발송도 폭력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남자친구의 질투와 집착, 혹은 폭행마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표현으로 간주해 버린다는 것이다. 소녀들의 착각 속에 주위의 어른들도 초기 증상을 방치하는 사이 문제는 심각해지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처럼 폭행경험이 있는 여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여학생들보다 마약, 술, 담배에 의지하는 경우가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청소년들의 교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다. 유럽 전체에서 10대 임신율 1위라는 불명예를 얻은 영국에서는 최근 일부 학교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섹스클리닉’을 중학교와 대학교에도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청소년 임신율을 내리기 위한 이번 조치에 따라 앞으로 11세 이상의 모든 학생들은 부모의 동의 없이도 이 클리닉을 이용할 수 있다.
영국의 일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영국 내 1000여 개의 학교들이 이미 성건강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며 상담은 물론 일부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사후 피임약을 제공하고 일부 대학에서는 ‘응급 시’ 콘돔까지 나눠주고 있다. 지역자치단체와 경찰에서도 성교육과 상담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영국정부가 10대의 임신율을 반으로 낮추겠다는 목표 하에 펼쳐온 다양한 정책의 결과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기대와 달리 10대 임신율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급격히 상승한 것으로 최근 통계청의 조사결과 드러났다. 이번 섹스클리닉 확대조치는 조금이라도 더 쉽게 더 가까이에서 학생들의 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음으로써 10대의 임신율을 잡아보겠다는 영국 정부의 강한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조치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전문가들은 섹스클리닉이 확대되면 10대에게 ‘성’은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으며 클리닉에서 상담 후 성관계를 미뤘다고 대답한 학생은 겨우 25%에 불과하다는 통계청의 설문조사를 들어 이번 조치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0대의 이성교제가 점점 어른들을 닮아갈수록 이들의 사랑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켜주기 위한 어른들의 책임과 노력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예준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