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소장파들 독한 반란
▲ 원로그룹 대위기 지난 4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연찬회. 당내 쇄신위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은 박희태 대표가 심각한 얼굴로 참석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런 문제의식은 소장파가 이번 전쟁에서 ‘사즉생’의 각오로 싸울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번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반면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 선언으로 혼란을 수습하려 했던 원로그룹은 그 존폐를 염려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여권의 권력 쟁투를 들여다봤다.
“급하면 밥 먹자고 하는데 이제는 자기 뜻대로 안 될 것이다.”
이상득 의원이 2선 후퇴 선언을 하기 며칠 전 소장파의 A 의원은 그에게서 ‘밥 먹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여러 번 이 의원의 ‘공허한 진정성’을 확인한 그로서는 ‘이제는 안 속는다’는 심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사실 이 의원의 2선 후퇴 선언에 대한 소장파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마디로 정치적 쇼다. 자신의 수족들이 요직에 그대로 있는 이상 말로만 뒤로 물러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시간 끌기 수법이다. 이 의원이 정치 판세를 잘못 읽어도 한참 잘못 읽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의 ‘안이한’ 시국인식을 보는 소장파의 시선은 착잡하다. 소장파는 국정을 책임지는 주류가 아님에도 오히려 이 의원보다 더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에야말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밖에는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들이 이렇게 위기를 느끼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을 믿는 민심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소장파는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 정도의 미봉책으로는 현 서거 정국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고 전망한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이 ‘강부자’ ‘고소영’ 인사 논란-촛불정국-4·29 재보선 참패-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을 거쳐 오면서 민심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볼 뿐 한 번도 진정성이 담긴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 곪고 곪은 상처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이명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 불길한 첫 번째 징후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 이후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민주당에 4년 만에 역전된 것을 들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대통령이 정국 수습책만으로 한 번 역전된 지지율을 다시 회복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제2의 탄핵사태 같은 ‘충격’ 정국이 오지 않는 한 추락한 지지율을 쉽게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런데 민심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이른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나라당을 지키는 ‘집토끼’들의 이반 현상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쇄신위원회(위원장 원희룡)는 지난 6월 4일 여의도연구소가 책임 당원 6400여 명을 대상으로 ARS 전화조사를 한 결과를 분석한 ‘여론조사 결과보고서’를 공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당 활동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당원은 35.6%에 그친 데 비해 부정적인 평가는 62.1%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나라당 당원 절반은 내각·청와대·한나라당 지도부의 전면 개편을 주장했다.
앞서의 핵심 소장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소장파 의원들이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는 부분도 바로 당원 상대 여론조사 결과가 결정적이었다.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민심 이반을 책임당원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원래 이번 조사 대상자들은 대부분 책임당원으로서 당 서열도 있고 조직파트에서 관리도 하던 핵심 세력들인데 일반 국민들과 똑같은 수치의 부정적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정권을 그나마 지탱해준 집토끼들의 탈출이 심각할 경우 이 대통령은 앞으로 국정의 원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해 리더십도 급격하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의 소장파들은 향후 정국에 대처하기 위해 정기적인 단합대회를 모색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일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소장파의 양대 축인 원희룡 정두언 의원은 이번 싸움에서 정치생명을 건 투쟁을 할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원 의원은 “당 지도부가 현상유지를 위해 책임지는 모습을 거부할 경우 쇄신특위 활동을 즉시 종료하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변화를 위해 모든 것을 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배수진을 쳤다. 그로서는 2000년 김대중 정권 때 초선으로서 권노갑 전 고문을 향해 정풍운동의 직격탄을 날려 일약 대권주자로까지 뛰어올랐던 정동영 의원이 생각날 것이다. 지난 2005년 혁신위원장을 맡아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던 홍준표 의원도 반면교사 대상이다.
정두언 의원도 지난해의 ‘권력 사유화 파문’을 전혀 개의치 않고 원로그룹과의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특히 그는 이번에도 조기전당대회를 반대하는 청와대와 당 지도부를 향해 ‘기득권 세력’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그의 이런 강경 발언에 대해 한 측근은 “정 의원도 이번 정권에서는 물 건너갔다는 것을 알고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신껏 일을 해보고 싶어도 현 체제에서는 기회를 얻기 힘들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소장파의 전선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국민’을 향해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이에 대해 “연찬회에서 결론이 안 났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싸움의 종결이 아니라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박희태 대표도 안 물러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우리는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느냐’와 ‘올바로 가는 길이 무엇인가’만 갖고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정파적 이해나 정치적 득실을 따지면 싸움은 실패한다. 오로지 국민만 보고 걸어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 대표가 누가 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만약 우리가 주류에 진압당하더라도 국민들은 진정성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을 확실하게 알 것이다. 지금 국민들이 한나라당의 변화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분은 우리에게 와 있다”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소장파가 정권 초 권력에서 밀려난 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정략적으로 정풍운동을 이용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정두언 의원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한나라당은 몰락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정 의원은 “비주류이던 노무현이 왜 대통령까지 당선이 됐느냐. 가진 게 없으니까 계속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은 계속 잃을 것만 걱정하기 때문에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키려다 결국 잃기만 한다”라며 쇄신운동에 불을 당기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