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으로 가는 ‘시한폭탄’
▲ 6·10항쟁 22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서울광장에서 범국민대회가 열린 가운데 야당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현 정부를 성토하고 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검찰의 최종 수사 발표가 논란의 끝이 아니라 치열한 2차 법리 전쟁과 피 말리는 정쟁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적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숱한 진기록만 남기고 법정으로 향하고 있는 ‘박연차 게이트’의 남은 미스터리와 핵심 쟁점을 들여다봤다.
대검 중수부는 6월 12일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해 박 전 회장을 포함해 정·관계 인사 21명을 기소하고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의혹 부분은 내사 종결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정치권과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켰던 노 전 대통령 수사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검찰은 당초 사안의 중대성과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 내용 중 일부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이미 ‘공소권 없음’ 처분을 했고, 참고인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등을 이유로 비공개를 결정했다.
검찰은 박 전 회장 등 이미 사법처리한 11명 외에 세무조사 무마 로비 관련 의혹을 받던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특가법상 알선수재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등 ‘박연차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정·관계 인사 10명을 이날 일괄 불구속 기소했다. 정치권 인사 중에는 박관용·김원기 전 국회의장, 한나라당 박 진·김정권 의원, 민주당 서갑원·최철국 의원이 기소 대상자에 포함됐고, 이택순 전 경찰청장, 김종로 부산고검 검사, 이상철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불구속 기소됐다.
반면 김태호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민유태 전 전주지검장, 박 아무개 부산고법 부장판사 등은 무혐의 처분됐다.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등 7명은 이미 구속 기소됐고, 정대근 전 농협 회장 등 3명도 기소된 바 있다.
이로써 올 상반기 정·관계를 뜨겁게 달궜던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로 핵심 의혹 규명에 실패했고, ‘죽은’ 권력만 잡고 ‘살아 있는’ 권력에는 면죄부를 줬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여진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뇌관이었던 노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됐고, 현 여권 일부 실세들이 개입된 의혹을 받았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사건 역시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정치권 주변에선 세무조사 무마 로비 사건의 몸통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이자 여권 실세인 천신일 회장을 지목해 왔다.
검찰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형평성 논란이 가열되자 천 회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7월∼11월 태광실업이 세무조사를 받을 당시 천 회장이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에게 조사 중단을 청탁하고, 그 대가로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7억여 원의 금전적 이득을 취한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이에 앞서 세무조사 무마 로비 사건과 관련해 박 전 회장으로부터 2억 원을 받은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구속하고 “한나라당 이상득, 정두언 의원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추 전 비서관의 진술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6월 2일 천 회장에 대한 영장이 기각되면서 천 회장과 여권 실세들에 대한 수사는 힘 한 번 못 써보고 종결됐다. 급기야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책임론에 부실수사 논란까지 직면한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사퇴하자 검찰은 천 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 방침마저 접고 불구속 기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말았다.
천 회장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대선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은 아예 처음부터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천 회장은 대선이 있던 해인 2007년 자사 주식을 매각, 330억 원을 마련해 돈의 용처에 대한 의문이 일었고,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 원을 대납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또 천 회장이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10억 원을 받아 이명박 후보 캠프에 전달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세무조사 무마 로비 사건의 또 다른 핵심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한상률 전 청장에 대해서는 소환조사 한 번 못해보고 면죄부를 줬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검찰은 한 전 청장의 출국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대형 돌출 변수가 발생했는데도 한 전 청장 소환 조사에는 소극적으로 임했다. 검찰은 한 전 청장에 대한 조사를 이메일과 전화조사로 대체하고 “로비 시도는 있었지만 돈은 받지 않았다”는 진술을 바탕으로 수사를 종결지었다.
‘박연차 게이트’의 또 다른 뇌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검찰이 한 차례 조사를 끝으로 무혐의 처리한 것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검찰이 금융계 거물로 여권 실세들과의 친분이 두터운 라 회장 수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최종 수사결과를 내놓았지만 의혹 해소는커녕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만 가중시키고 있어 향후 사건 당사자들의 치열한 법정투쟁과 맞물려 정치 공방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특검과 국정조사 카드를 꺼내들면서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2차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6월 12일 검찰 수사 발표에 대해 “표적 수사, 보복 수사가 아니었다는 치졸한 변명,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놓고도 여전히 반성 없는 검찰의 모습에 절망감을 느낀다”고 맹비난하며 법무부 장관과 대검 중수부장의 즉각 파면을 요구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은 박연차 특검 도입과 국정조사를 즉각 수용해 검찰 수사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박연차 게이트’뿐만 아니라 부실 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천 회장과 한 전 청장에 대해서도 특검과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12일 “천신일-MB 대선자금이라는 본질은 놔두고 노 전 대통령과 야당 의원에게 정치보복을 했다는 사실을 특검을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지난 4월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청탁사건 특검법’을 국회에 제출한데 이어 6월 5일에는 이 대통령과 천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을 한 상태다. 민주당이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검찰의 최종 수사 발표를 신호탄으로 이 대통령과 여권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이번 수사가 권력형 부패의 재발을 막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긍정적 입장을 나타내면서 민주당이 요구하고 있는 특검과 국정조사는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윤선 대변인은 12일 논평을 통해 “권력형 부패 근절을 향한 검찰의 노력이 앞으로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미완성’으로 마무리된 만큼 박 전 회장과 천 회장, 친노 인사들 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전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가 박 전 회장의 진술을 바탕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박 전 회장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거나 부인한다면 검찰의 표적·기획수사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또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들이나 참고인들이 숨겨진 비밀을 폭로할 경우 정치권 전체가 또 다시 게이트 정국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