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왕따의 기억이 ‘괴물 버튼’ 꾸~욱
▲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현장검증 모습. | ||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이었으며, 1980년대 중반 테드 번디와 데이비드 버코비츠(1977년 6명을 죽이고 7명을 다치게 한 살인범) 사건을 담당했던 FBI의 특수요원 로버트 레슬러가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면서 점차 알려졌다.
FBI가 정의하는 ‘연쇄살인범’이란 첫째, 최소 3~4명을 일정 간격을 두고 살해하거나 둘째, 안면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르거나 셋째, 희생자를 가학적인 방법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넷째, 물질적으로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다섯째, 희생자들을 어떤 상징적인 목표물로 보거나 여섯째,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매춘부, 가출 청소년 등)을 범행 대상으로 삼는 범죄자들이다.
또한 범죄학자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백인의 미혼 남성이 많으며 ▲상당수가 평균 IQ 이상이고 ▲고정된 직업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포악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8~14세 때까지 여전히 이불에 오줌을 싸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밖에 연쇄살인범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 유난히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관료들에게 열광하거나 매료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자’ 역할을 갈망했던 것이다. 가령 존 웨인 게이시의 경우 자신을 경찰로 위장해서 희생자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경찰 배지를 차고 경찰차와 유사한 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린 소년들을 끌어 들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됐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며 희생자들이 경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훨씬 용이했다고 밝혔다.
종종 경찰 행세를 하고 다녔던 테드 번디 역시 “나는 삶과 죽음을 지배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살인범으로 만든 것일까. 범죄심리학자들은 이들이 살인범이 된 동기는 다양하다고 말한다. 대개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거나 또는 뇌 손상 등이 이유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바로 불우한 가정환경이다. 연쇄살인범들 가운데 정상적인 유년 시절을 보낸 경우가 드물다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대부분 어릴 때부터 이미 조숙했으며, 폭력을 일삼곤 했다. 가령 에드먼드 캠퍼의 경우 누나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의 머리를 자르거나 ‘사형 놀이’를 즐겼으며, 2학년 때에는 “선생님한테 키스를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먼저 선생님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질이 포악하고 폭군처럼 행동하는 어머니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자랐던 캠퍼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으로 연쇄살인의 행각을 끝냈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를 벤 후 성대를 잘라 쓰레기통에 버렸으며, 시체를 강간한 후 자른 머리를 거실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 놓고 다트판으로 사용했다.
반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으로 처음 살인을 시작했던 헨리 리 루카스 역시 포악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술주정뱅이였던 어머니 때문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던 그는 7세 때까지 여자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는 “나는 계집애로 살았다. 계집애처럼 옷을 입고, 계집애처럼 머리를 길렀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머리를 자르고 오자 허락 없이 머리를 잘랐다며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으며, 하루는 각목으로 뒤통수를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된 그는 “여자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내 눈에 보이는 여자들을 죄다 죽여 버리고 싶다. 때문에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잘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존 웨인 게이시는 술주정뱅이에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자신을 ‘겁쟁이 같은 놈’ ‘괴상한 놈’ ‘실패자’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어려서 자신이 키우던 개가 아버지의 총을 맞고 죽는 것을 보기도 했으며, 훗날 희생자들의 목을 조를 때마다 “침착하고 용감하게 있어라”라고 다독였던 것도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짓눌려 있던 자신의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가정환경이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던 테드 번디나 제프리 다머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 심리학자들은 대다수의 살인범들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부모나 가정환경을 탓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경험도 살인의 늪으로 빠지는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고립될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럴 때마다 상상 속의 세계에 의존하면서 점차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상상은 방화나 동물학대 등의 행동으로 표출되곤 한다.
헨리 리 루카스는 어린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으며, 이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특히 어린 시절 나이프에 찔린 왼쪽 눈이 비뚤어져 있어 놀림감이 되곤 했으며, 훗날 말하길 “왕따당한 기억 때문에 사람들을 증오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프리 다머는 비사교적인 성격이었으며, 친구들이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면 고소해하며 웃곤 했다. 10대 때 이미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 왼쪽부터 테드 번디, 에드먼드 캠퍼,제프리 다머 | ||
강호순이 ‘테드 번디형’ 범죄자라는 한국범죄심리학회의 발표 때문에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이름이 됐다. 강호순과의 공통점은 잘생긴 얼굴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는 점, 사회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그는 1974~1978년 4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무려 30여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 특히 잘생긴 외모와 수려한 언변, 비상한 머리로 한때 ‘연쇄살인의 귀공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법대생이었던 그가 범행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주로 여대생들이었다. 그는 팔이 부러진 척 붕대를 감고 나타나 여학생들에게 자동차까지 책을 들어달라고 부탁한 후 일단 자동차에 타면 야구 방망이 등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살해했다. 성폭행한 후 살인을 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1989년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당했으며, 아직까지도 실제 그가 몇 명의 여성을 살해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체포된 후에도 계속 혐의를 부인하다가 억지로 자백한 수만 30명이지 사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에드먼드 캠퍼
10세 때 고양이들을 산 채로 암매장했다가 다시 꺼내 머리를 잘라 방에 진열해 놓았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포악한 성격이었다.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15세 때 조부모를 총으로 쏴 살해한 후 정신병원에서 생활했다. “할머니를 쏘면 기분이 어떨까”하는 호기심 때문에 살인을 했다고 자백해서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1972~1973년 불과 1년 동안 6명의 여성들을 살해했다. 자동차를 타고 배회하다가 길거리에서 혹은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들을 태운 후 무참하게 살해했다. 한적한 곳으로 여성들을 태우고 간 후 수갑을 채우고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거나 혹은 목을 졸라 살해했다.
시체를 집으로 옮겨와서 시간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성관계가 끝난 후에는 토막을 냈다. 심지어 시체의 머리를 벤 후 오럴섹스를 하기도 했다.
1973년 자신의 어머니를 둔기로 살해한 후 머리를 자르고 몸통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 멀리 길을 떠났다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직접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다. 현재 종신형으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제프리 다머
‘식인 살인마’라는 별칭이 붙어 있을 정도로 잔혹했으며 강간, 고문, 살인, 식인, 시체 강간 등 살인범이 저지를 수 있는 변태적인 행위란 행위는 모조리 저질렀다.
1978년부터 1991년 체포될 때까지 13년 동안 17명의 어린 소년들을 살해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주로 게이바에서 범행대상을 물색했으며, 흑인이나 빈민층 자녀들을 골라 살해했다. 돈을 주고 미성년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인 후 약물에 취하게 한 다음 잔인하게 살해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시체 사진을 일일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보관하고 있었으며, 살인 후에는 시체를 강간하거나 인육을 잘라서 먹기도 했다. 시체를 토막 내거나 목을 베기도 했으며, 자른 머리는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시체의 머리에 전기드릴로 구멍을 뚫거나 약물에 취해 있는 살아있는 소년의 머리에 구멍을 뚫고 염산을 붓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법정에서 95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4년 죄수들과 싸움을 벌이다가 흑인 죄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 왼쪽부터 존 웨인 게이시,헨리 리 루카스, 찰스 맨슨 | ||
1972~1978년 33명의 소년을 살해했다. 평소 광대 분장을 하고 공연을 하던 기괴한 모습 때문에 ‘살인마 광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린 소년들을 성추행하다가 체포되는 등 동성애자였던 그는 주로 길가나 버스 정류소에서 10대 소년이나 남창들을 자동차에 태운 뒤 집으로 데리고 왔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 납치하기도 했다. 집에 들어오면 희생자의 손에 수갑이나 밧줄을 묶은 후 몽둥이로 구타한 다음 강간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마루 밑의 공간에 묻었으며, 공간이 부족해지자 나머지 시체들은 인근 강가에 버렸다. 마루 밑에서 발견된 시체만 모두 29구였으며, 어떤 시체는 이미 부패 정도가 심각해 신원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루 밑에 시체가 가득 쌓인 채로 이웃집 사람들을 초대해서 정원에서 파티를 열 정도로 냉혈한이었던 그는 1994년 사형당했다. 그가 14년 동안 감옥에서 그렸던 광대 그림들은 그가 죽은 후 경매에 붙여졌고, 어떤 작품은 9500달러(약 1300만 원)에 팔리기도 했다. 이렇게 팔린 그림들은 대부분 유가족들에 의해 구입된 후 불태워졌다.
헨리 리 루카스
1960년부터 1983년 동안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대의 살인마다.
워낙 거짓말을 일삼고 수시로 자신의 진술을 번복한 탓에 아직까지도 실제 그가 몇 명을 살해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처음 체포됐을 당시에는 35명이라고 진술했다가 법정에서는 3000명을 살해했다고 말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주로 오티스 툴이라는 친구이자 또 다른 살인마와 함께 미 전역을 돌며 범행을 저질렀다. 이곳저곳 떠돌이 여행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만나 차에 태운 여자를 살해한 후 토막을 냈다.
1960년 술에 취한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로 찔러 죽였으며,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 후 출소한 후에도 범죄 행각은 끊이지 않았으며, 결국 1983년 케이트 리치를 살해한 혐의로 75년형을, 그리고 베키 파웰을 살해한 혐의로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사건들은 그가 주장만 했을 뿐 명백한 증거는 없어 구형을 받지 않았다.
2001년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찰스 맨슨
17년 동안 절도 및 강간 등으로 교도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6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히피 문화에 편승해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뛰어난 언변으로 ‘맨슨 패밀리’라는 일종의 추종자 무리를 만들어서 활동했으며, 예수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
첫 번째 살인은 1969년 게리 힌맨이라는 마약상을 살해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돈 문제로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살해했으며, 이틀 후 맨슨은 추종자들에게 로만 폴란스키 감독 부부의 집으로 가 살인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네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한밤중에 베벌리힐스에 위치해 있던 폴란스키 집으로 잠입해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부인 샤론 테이트를 포함해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당시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 촬영으로 집을 비운 상태였다.
이들은 다음 날 다시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번에는 LA에 있는 레비앵커 부부를 칼과 포크로 무참히 찔렀다.
맨슨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사형 제도가 폐지된 후 현재 교도소에서 종신형으로 복역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