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2014동계올림픽 ‘반납’
▲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소치를 방문한 푸틴 전 대통령(왼쪽)과 메드베데프 대통령(오른쪽). | ||
평창을 따돌리고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던 러시아의 작은 해안 도시 소치가 이런저런 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렇게 하다간 올림픽 유치 자체를 철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30여 년 만에 자국에서 열리게 될 올림픽 유치에 기뻐했던 소치 주민들은 20개월이 지난 지금 불안감과 배신감에 휩싸여 있다. 문제는 여러 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경기 침체에 따른 예산 축소,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과 배신감, 심각한 환경파괴 논란, 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둘러싼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발등에 떨어진 불은 오는 26일 치러질 소치 시장 선거다.
소치 시장 선거는 당초 26명의 후보가 출마의사를 밝히는 등 처음부터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수선했다. 후보 등록이 끝난 현재는 9명으로 대폭 줄었지만 한동안 포르노 여배우, 발레리나, 심지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까지 출마 의사를 밝히는 등 후보들의 독특한 배경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전 유럽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렇다면 여야 할 것 없이 이번 선거에 열중하고 있는 까닭은 뭘까.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재임 기간 동안 치러질 소치 올림픽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경우 정치인으로서 몸값이 오를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
때문에 순식간에 푸틴 전 대통령의 명성에 버금가는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하는 기회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수십조 원에 달하는 올림픽 예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매력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밖에도 야당에겐 소치 시장 당선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만일 당선이 된다면 소치 올림픽 유치에 정성을 쏟았던 푸틴에게 한 방을 먹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소치는 평소 푸틴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스키 리조트이자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곳으로, 대통령 재임 시절 정성껏 공을 들여서 올림픽 유치를 이루어냈을 만큼 의미 있는 곳이다.
따라서 푸틴 측은 가능한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후보이자 현재 소치 시장을 직무대행하고 있는 아나톨리 파호모프가 당선되길 희망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푸틴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파호모프의 무난한 당선을 점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번 선거를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승부는 끝까지 지켜봐야 안다”며 조심스런 입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49), 그리고 골리앗은 푸틴을 말한다.
한때 ‘보리스 옐친의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넴초프는 소치에서 태어나고 자란 말 그대로 ‘정통 소치파’다. 동시에 대표적인 ‘반 푸틴’ 인사이기도 한 그는 우파 연합인 ‘솔리데러티’ 소속의 후보이자 고향인 소치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유력한 당선 후보다.
하지만 여권에서 그를 경계하고 있는 보다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가 푸틴뿐만 아니라 소치 올림픽 자체에 대해서도 다분히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소치 주민들 편에 서서 “이번 올림픽은 문제가 많다”며 올림픽 준비 과정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 소치 개발 모형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을의 주민들은 개발이 시작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 | ||
당초 푸틴이 책정했던 예산은 125억 6000만 달러(약 11조 5000억 원). 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이보다 두 배는 더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돈줄마저 막혀버렸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맞물린 러시아의 장기 불황은 러시아 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올리가르히들(신흥 갑부들)의 지갑을 닫게 만들었다. 가령 러시아 최대 갑부이자 푸틴의 절친한 친구인 올레그 데리파스카의 현재 순재산은 기존의 280억 달러(약 31조 원)에서 35억 달러(약 4조 7000억 원)로 확 줄었다.
사정이 이러니 당초 그가 약속했던 도로 건설, 해변 산책로 조성, 소치 공항 터미널 신축, 선착장 건설, 스케이트 경기장 건설 등도 불투명해졌다.한편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지만 정작 소치 주민들이 받게 될 보상금은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땅값이 올랐기 때문에 쥐꼬리만한 보상금으로는 도무지 옮겨갈 곳이 없게 된 것이다. 가령 3년 전 소치 남쪽의 ‘이메르틴스카야-티페네’ 마을에 이주해서 집을 지어 살고 있던 데니스와 엘레나 티슬랴코프 부부는 처음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이제 경기가 좋아지겠구나”라며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 기쁨은 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집을 비울 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푸틴이 철거민들에게 모스크바의 빌라 한 채 값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데니스는 “이제는 보상 자체를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한숨을 쉬고 있다.이들 부부처럼 이주 명령을 받은 주민들은 약 2000명. 하루가 멀다 하고 근육질의 남자들이 집 앞에 찾아와서는 “멍청하게 굴지 말고 당장 이사를 가라.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는가 하면, 고집을 피우는 주민들을 가리켜 ‘비애국자’ ‘반 푸틴 인물’이라고 비난하고 있다.하지만 ‘반 푸틴’을 주장하고 있는 넴초프의 당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인지도 모른다.
이유는 바로 러시아의 뿌리 깊은 선거 비리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경쟁상대인 넴초프를 향한 크렘린궁의 견제는 은밀하면서도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례로 관리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소치 지역의 언론사들은 아예 넴초프에 대해서 보도를 안하거나 부정적인 기사들만을 다루고 있다.
넴초프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던 한 유력신문사의 편집장이 다음날 바로 해고되는 일이 발생했는가 하면, 대형 라디오 방송국들은 넴초프의 선거 캠페인 광고 방송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급기야 선거 전단지마저 소치 경찰에 의해 압수당하자 넴초프는 하는 수 없이 발로 뛰어다니는 방법을 택했다.
현재 그는 길거리, 레스토랑, 카페, 해변가, 버스 정류장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유권자들을 만나고 있다.이제 선거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과연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기적이 벌어질지 러시아인들의 관심은 온통 소치로 향해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