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그림자’ 지우기 시작됐나
▲ 박형준 홍보기획관.(왼쪽 사진)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오른쪽 사진) | ||
원로그룹의 전면적 후퇴는 여권의 신실세 그룹 부상과 맥을 같이한다. 최근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이 주창한 ‘중도실용주의론’이나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사교육 철폐론도 여권 내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신실세 그룹이 전면에 나서는 것과 맞물려 있다. 과연 새롭게 뜨고 있는 신실세 그룹이 이 대통령에게 탈출로를 확보해줄까.
지난 6월 3일 이상득 의원은 ‘2선 후퇴 선언’을 발표했다. 그 뒤 권력 핵심에서 그의 그림자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한 권력의 저수지는 봇물이 터진 듯 이내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물론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여전히 ‘이상득 의원의 영향력’을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피로 맺어진 여권의 해(이명박 대통령)와 달(이상득 의원)은 정권 내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는 ‘더 이상 방치해둘 경우 형이 완전히 ‘죽을’ 수도 있다’는 동생 이명박 대통령의 원려가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한 번 흠집이 난 2인자는 절대 예전의 파워를 회복할 수 없다’라는 권력의 속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의원이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의 불안정성을 지탱해준 1회용 버팀목이었을 뿐 정권 내내 승승장구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단언한다.
지금으로선 이 의원의 완전한 퇴진을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신임 검찰총장과 국세청장 인사에 대해선 정치권 관계자 대부분이 ‘파격적’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는 곧 이상득 의원 인맥이 광범위하게 포진돼 있던 기존 라인의 대대적 물갈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의원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임을 시사한다. 먼저 검찰총장 인사 뒷이야기를 보면 현재까지 그 어디에도 이상득 의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검찰은 신임 총장 발표 당일 아침까지만 해도 K 고검장이 임명되는 줄 알고 준비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검찰 내 대표적 대구경북(TK) 인맥(대구 출생)이라는 점에서 ‘이상득 라인’으로 분류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천성관 신임 총장 인사와 관련해 이 의원의 그림자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여기에는 뜻밖에도 이 대통령의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이름이 등장한다. 천 회장이 영양 천씨 종친회장을 할 때 천 총장 내정자가 부회장을 맡아 종친회를 이끈 적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올해 초 천 내정자가 수원지검장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번에 파격적으로 검찰총장에까지 오른 것도 천 회장이 막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또한 수사실력에도 권력의 심기를 건드려 김대중-노무현 정권 내내 겉돌았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 인수위에 참여하고 차기 민정수석으로도 유력하게 거론되는 P 변호사가 천 내정자의 ‘능력’을 높이 사 적극 천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고위직 인사 때마다 관가의 단골 뒷담화거리였던 이상득 라인 이야기는 이번 인사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최근 “앞으로 정무직을 제외한 각 부처의 실무 간부 인사를 장관에게 맡길 생각”이라고 직접 언급한 부분도 멀리 보면 지금까지 관가 요직에 포진돼 있는 ‘SD 라인’의 정리와 함께 일부 정치권 실세에 의해 독점돼 온 왜곡 인사 관행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그동안 관가에서는 “장관이 과장급 인사도 함부로 못 한다”라는 말들이 무성했다. 특히 몇 개 부처의 1, 2급 간부들의 경우 이상득 의원 라인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동안 여러 비선라인을 통해 일부 실세의 인사 개입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고 있었던 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그들에게 경고를 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공개 발언이 마치 ‘형’ 이 의원의 인사 개입에 대한 견제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 “이 대통령이 이 의원의 인사 개입을 막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식의 해석은 논리의 비약이다”라고 강조하면서 항간의 추측을 강하게 부인했다.
한편 국세청장 인사의 경우도, 전통적으로 선후배 관계와 내부 규율을 중요시하는 국세청에 ‘외부 인사’가 떨어진 것을 두고 조직 전체가 패닉 상황에 빠졌다고 얘기할 정도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 임명된 허병익 차장(2008년 12월)을 비롯한 고위급 간부가 대거 퇴출 대상에 올라 국세청에도 이상득 라인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권의 권력 구도가 이상득 의원의 2선 퇴진뿐 아니라 원로그룹의 전면적 퇴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의원과 함께 권력 핵심으로 거론되고 있는 A 씨의 위상도 예전에 비해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A 씨는 최근 공개석상에서 이 대통령으로부터 현안 대응과 관련해 크게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이 대통령이 특정인을 지칭하며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A 씨를 향해 던진 대통령의 불만이었기 때문에 당시 A 씨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권 내 A 씨의 위상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이 그동안 그를 최대한 예우해줬는데 최근 공개석상에서 업무와 관련해 질책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관가의 한 소식통은 이에 대해 “최근 이 대통령이 권력 실세 가운데 몇몇 인사들의 경우 업무 능력에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그동안의 권력 구도에 큰 변화가 올 것임을 시사하는 중대한 기류 변화”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이런 생각의 변화는 국정 운영 기조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상득 의원으로 대표되는 정권 1기 실세 라인의 대거 퇴진과 함께 소장그룹과 전문가 그룹을 양대 축으로 하는 정권 2기 라인의 전면 포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소장그룹에는 최근 중도실용주의론을 기획해 주도하고 있는 박형준 홍보기획관과 사교육 철폐안으로 이 대통령의 재신임을 획득한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상징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곽 위원장과 함께 사교육 철폐론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정두언 의원이 향후 권력 핵심에 재진입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또한 차기 정무장관으로 거명되는 권오을 전 의원도 소장파가 전면에 나설 경우 입각이 예상된다.
이 대통령은 또한 기존 소장파 그룹과 함께 주로 서울시청 출신인 전문가그룹도 더욱 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국세청장으로 임명된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의 경우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때 시정개발연구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브레인풀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이 대통령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원세훈 국정원장을 가장 자주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도 깊다. 원 원장은 이 대통령 곁에서 행정부시장을 역임하며 확실한 인정을 받은 뒤 정보기관 핵심인 국정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평소 국정원이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본래의 정보수집 기능이 많이 취약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원 원장을 내려 보내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세우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깊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이상득 의원이 물러난 자리에 ‘박형준-곽승준 라인’과 ‘원세훈-백용호’ 라인이 각각 소장파와 전문가그룹의 대표주자로서 여권의 신실세 그룹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완전히 원로그룹을 내치기에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여전히 소장파의 원로그룹 퇴진 요구를 권력투쟁적 주장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들의 정책 추진 능력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원로그룹의 퇴진은 취임 2기를 맞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변화의 첫 단추라는 데 이견은 없는 것 같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