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장인과 청년 입주자의 만남? “서로 뭐하는지 몰라”…유동인구 그대로인데 임대료는 상승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3층 입구에서 들을 수 있는 ‘세봇’의 환영인사다. 세봇은 세운상가와 로봇의 합성어다. 지난해 세운상가의 과거 명성을 되찾자는 의미로 기술 장인들과 예술가, 스타트업 종사자들이 협업해 만든 세운상가 상징물이다. 하지만 현재 세운상가에 불어닥친 예상치 못한 찬바람은 세봇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
‘다시 세운’ 세운상가의 상징물 ‘세봇’. ‘협업’이라는 세봇의 의미가 무색하게 기존 기술자와 신규 입주자의 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9월 전기·전자산업 메카였던 세운상가가 재생사업을 마치고 3년 6개월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낙후·침체된 세운상가 일대를 창의제조산업 혁신지로 재도약시키기로 약속한 서울시의 야심찬 결과물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건물을 보행로로 연결해 접근성을 높이고, 각종 문화·편의시설 등의 마련으로 상가 일대를 시민 쉼터로 탈바꿈할 것을 목표로 세웠다. 무엇보다 청년 스타트업 및 전략기관 입주 공간을 마련해 기존 기술 장인과 신규 입주자 간 협업을 꾀했다. 세운상가를 ‘4차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부활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개방 후 2개월간 기존 상인·기술자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거의 없는 듯하다. 이들과 새로 입주한 청년 창업·벤처 사업자 간 협업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서로 간에 교류나 정보공유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아서다.
기존 상인·기술자들은 협업 가능성마저 낮게 평가한다. PCB제작업체 ‘제일과학’을 운영하는 함병기 씨는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하겠냐”며 “이뤄진다 해도 매출 향상에 도움이 될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동민 대림상가상인회 회장은 “새로 입주하신 분들과의 접점은 거의 없다”며 “그들과 협업을 도모하는 상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이들 기술력·물품의 주 수요층은 기존 거래처에 머물며 매출엔 큰 변화가 없었다.
새로 입주한 청년 사업자들은 협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그 수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들과 기존 상인 간에 주로 이뤄지는 건 필요 부품거래 정도다. 소프트웨어 제조업체 ‘Circulus’ 박종건 대표는 “일부 부품 등은 세운상가에서 조달받고, 기술 장인분들께 맡기는 건 3D프린터 제조과정에서의 금속가공 정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규 입주자들이 사업 시작 단계라 기존 분들과 기술이나 정보 등을 공유하며 접점을 찾을 여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3D프린터 제조업체 ‘5000℃’ 관계자는 “저희가 도안을 넘기면 장인들이 제조해주는 식의 협업을 일궈낼 수 있겠으나 아직까진 구상 단계”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협업을 용이하도록 만들기 위해 세운상가 일대 산업군과 활용 가능 자원 등을 취합한 ‘세운상가 산업지도’라는 인터넷 플랫폼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초기 단계여서인지 이를 활용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썬문전자 이승연 씨는 “서울시가 나서서 상호 간 연계방안이나 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런 뒷받침 없을 경우 재생사업은 안 하니만 못하다”고 비판했다.
신규 입주자들은 직접 ‘기술공유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장인과 입주자 간 교류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모임을 책임지고 있는 플랫폼 사업체 ‘A planet’ 박대현 대표는 “시 차원에서 마련한 정보공유나 협업 등의 프로그램이 없어 우리가 먼저 자생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참석 인원은 30명으로 전체 세운상가 상인·기술자들 수를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박 대표는 “기술공유, 협업을 위한 세미나나 포럼 등은 상가 내 네트워킹이 우선적으로 구축된 이후에야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며 “서울시 지원이 이뤄진다면 더 속도가 붙겠지만, 시 역할은 아직 하드웨어적 정비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없어 한산한 세운상가 1층 광장. 이종현 기자
재생사업으로 크게 늘 것으로 기대했던 유동인구도 그대로다. 시는 옥상전망대·세운홀 등의 공간을 마련하고 청년점포 등을 입주시켜 문화공간을 형성하고자 했지만 아직 효과가 나타나고 있진 않다. 대경전자 김 아무개 씨는 “최근 서울시에서 대학생 알바를 고용해 유동인구 조사를 나섰는데, 당시 학생들은 일평균 방문자 수가 200명도 채 안 된다고 일러줬다”며 “그중 반 이상이 상인들일 것”이라 설명했다. 케이크 가게 사장 신미옥 씨도 “먹거리, 즐길 거리가 적다 보니 방문자 수가 점차 줄고 있는 것”이라며 “일평균 매출은 3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다른 카페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눈에 띄게 변한 건 상가 활성화 기대에 따른 임대료 상승이다. 현재 대부분의 점포 임대료는 10~15% 올랐다. 서울시는 임대인들과 임대료를 일정 수준 이상 올리지 않도록 하는 상생 협약을 맺었으나, 강제성은 없다. ‘원창전자’를 운영하는 차지철 씨는 점포 임대료가 30만 원에서 10만 원 올라 얼마 전 저렴한 곳으로 옮겼다고 귀띔했다.
상가 1층 차도·보행로 정비가 주차공간을 좁혀 상가 방문 거래업자들의 불편만 늘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행로 확장으로 주차방식이 사선식에서 일자식으로 바뀌었고, 20대가량의 주차공간이 줄었다. 보행로의 활용가치는 떨어지고, 좁아진 주차공간은 방문객들의 진입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게 상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서울시 입장에서 보행로 확보는 ‘4대문 안 차량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서 상가 환경개선에 중점을 둔 결정이었다. 이창구 다시·세운사업 팀장은 “3개월이 넘는 긴 논의 끝에 상인들 이해를 구하고 시행한 조치”였다며 “추후 주변에 대형건물이 들어설 경우 주차공간을 대여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협업을 위한 서울시 측 고민도 없던 건 아니다. 서울시로부터 용역을 받아 세운상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메타기획컨설팅업체는 예비창업자·아마추어의 제품 개발 및 시제품 출시를 돕는 ‘집중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등을 구상 중에 있다. 상가 내 마련한 기술중개실에선 기술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지인과 기술 장인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곽동근 메타기획컨설팅 팀장은 “아직 홍보가 많이 안 돼 활발히 운영되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방향은 잘 잡아가고 있다”며 “1000여 개가 넘는 상가 입주 업체를 모두 참여시키는 협업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동인구와 관련해 서울시는 “이 사업이 세운상가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것보다 4차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탈바꿈시키는 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다. 대신 서울시는 추후 교육청과 협의해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직업탐방 교육, 전자키트 만들기 등의 워크숍 등을 추진해 유입인구를 점차 늘릴 계획이다. 장인과 청년사업자 등을 강사로 내세운 기술학교 운영도 대폭 확대할 구상도 하고 있다. 이창구 팀장은 “올해 진행됐던 ‘세운 메이커 페스티벌’, ‘상상력 발전소’도 지속적으로 개최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문화예술축제 등에 대한 고민도 멈추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터무니없이 임대료를 높이 올리는 임대인들에 대해선, 상인회와 시가 공동 대응해 기존 임차인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 중에 있다. 이창구 팀장은 “지금은 임대료 상승추세가 많이 가라앉았기에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추후 주변 시세에 덩달아 인상하는 임대료를 강제적으로 규제할 순 없다는 점엔 동의했다.
10월 말 상인회, 신규 입주기업, 서울 전략기관 대표자 등이 모여 세운상가 발전을 함께 논의하는 시민협의회가 발족했다. 서울시는 “기존까진 관이 주도했지만, 이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주도권을 넘겨 4차 산업혁명 거점 조성을 위한 협업, 각종 문화사업 구성 등을 점차 이뤄나갈 것”이라 밝혔다.
이성진 인턴기자 ls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