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아래 ‘박정희 피난처’ 있을 줄이야~
1970년대 승강장 모습을 간직한 신설동 유령역 내부 모습. 박정훈 기자
지난 24일 <일요신문>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70년대 지하철역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일명 ‘신설동 유령역’이다. 현재 지하철 1·2호선 환승역인 신설동역 지하 3층에 위치해 있다. 역사 관계자의 안내를 따라가보니 2호선 승강장 구석에 있는 보라색 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철문 밑에 위치한 곳이 바로 ‘신설동 유령역’이다. 철문을 열자마자 지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철문 너머 계단을 따라 내려가보니 또 다른 승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승강장은 지난 1974년 지하철 1호선 건설 당시 5호선의 일부가 될 신설동 역을 동시에 건설했지만 노선이 변경되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이 승강장은 40여 년 동안 시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폐쇄된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이를 반증하듯 승강장 바닥은 콘크리트 그 자체로 남아있다. 외벽엔 누수 흔적과 먼지에 쌓인 ‘11-3 신설동’ 역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모든 게 자동으로 이뤄지는 현대식 승강장에선 볼 수 없는 열차 전용 신호등도 녹이 슨 채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폐쇄된 공간은 아니다. 현재는 군자차량기지로 입고하는 열차가 통과하는 선로로 활용되고 있다. 때마침 오전 10시 44분 운행을 마치고 신설동 유령역을 지나 차량기지로 돌아가는 1호선 열차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70년대 역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덕분에 그동안 ‘엑소’, ‘트와이스’ 등 국내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쓰여 왔다. 또 드라마 <스파이>, <아테나 : 전쟁의 여신>과 영화 <감시자들>의 촬영 장소 일부로 활용됐다.
19일 오전 10시 44분 운행을 마치고 신설동 유령역을 지나 차량기지로 돌아가는 열차 모습. 박정훈 기자
현재 이곳은 지난 21일을 시작으로 오는 11월 26일까지 주말에만 한시적으로 사전 신청자들을 받아 시간대별로 인원을 제한해 공개하고 있다. 하루 30분씩 4회 관람이 진행되며 각 회마다 20명의 관람객 제한을 두고 있다. 차량기지로 입고하는 열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주말 오후 12시~오후 4시 사이에 관람일정을 편성했다는 게 역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이미 공개 마감일인 11월 26일까지 사전 신청예약이 끝났다”며 “시범적으로 운영해본 뒤 중장기적인 활용방안을 다시 모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버스환승센터 부근에 위치한 ‘지하벙커’. 직장인들이 즐비한 여의도 금융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1번 버스 승강장 근처에서 지하벙커로 향하는 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지하벙커는 처음 벙커가 발견된 2005년 이후 서울시는 10여 년 동안 사업비 부족 등으로 보존만 해놓다가 최근 시민의견을 수렴해 서울시립미술관 별관 ‘Sema 벙커’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장으로 바꿨다.
입구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연면적 871㎡ 규모의 지하 벙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각종 전시작품들. 11명의 작가들이 사진과 영상, 설치물을 기획해 전시공간으로 꾸며 놨다. 이 가운데 특히 독립 큐레이터 윤율리 씨와 이유미 작가가 기획한 흰색 예비군 군복 전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유리와 PVC, 비닐과 펄 소재가 군복 곳곳에 사용됐고 모자엔 계급장 대신 은색 자수가 들어갔다.
전시관 안쪽 좁은 통로를 지나면 또 다른 비밀의 방이 있다. 바로 귀빈실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이 방에는 소파와 화장실, 샤워장 등이 있는데 소파는 비슷하게 복원해 시민들이 직접 앉아볼 수 있게 했고 화장실 변기 등은 유리막으로 둘러싸인 상태지만 발견 당시 모습 그래도 뒀다. 발견 당시 나온 열쇠박스도 복원해 전시했다. 아울러 벙커의 두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코어 조각(건축자재 일부)도 전시해 놨다.
여의도 지하벙커 내 귀빈실 모습. 2005년 발견 당시 찾은 화장실, 샤워실, 소파 등이 전시돼 있다. 박정훈 기자
지하벙커는 2005년 서울시가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만들기 위해 현지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서울시는 시가 보유한 항공사진을 봤을 때 벙커 출입구가 1977년 자료 이후부터 표시돼 있어 이로 미루어 1976년 말에서 1977년 초 사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 관계자는 “벙커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의 사열대 단상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대피용 시설로 조성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이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지하벙커를 만들었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다.
지하벙커를 바라본 시민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던 때라 지하벙커에는 인근 직장인들로 붐볐다. 귀빈실에서 화장실을 유심히 지켜본 직장인 박경호 씨(50)는 “부서 직원들과 점심 먹고 회사 들어가는 길에 들어와 봤다. 뉴스에서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던 지하벙커를 실제 들어와 보니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고유진 씨(27)는 “매일 지나가는 환승센터 밑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 몰랐다”며 “버스 타면서 잠시 들러볼 수 있고 시민들과 가깝고 알기 쉬운 전시들이 앞으로도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역사학도라고 밝힌 대학생 이 아무개 씨(23)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벙커를 일반인에 공개한 것은 잘한 일 같다”면서도 “하지만 벙커 발견 당시 본연의 모습을 좀 더 추구해 꾸며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귀빈실은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라 복원에 힘쓴 듯하지만 예술작품을 전시해놓은 옆 공간은 대통령 수행원들이 대기하던 대기실이란 말도 있기 때문에 전시작품을 놓을 게 아니라 그것 자체도 있는 그대로 놔두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지하벙커는 지난 19일 개관식을 가진 이후 연일 수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현장 안내 직원은 “이 방은 최대 200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면서 “매일 평균 1000명 정도가 방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지하벙커는 매주 화요일~일요일 방문이 가능하며 예술작품이 전시된 전시공간은 오는 11월 26일까지 계속된다.
터널식으로 만들어진 돔 형태의 경희궁 방공호 내부 모습. 박정훈 기자
여의도 지하벙커를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희궁 방공호’를 찾았다. 서울의 또 다른 비밀공간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경희궁 방공호는 일제 말기였던 1944년 비행기 공습에 대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앞서 여의도 지하벙커와 같이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태평양 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가 비상통신시설을 겸해 만든 대피시설이라는 게 가장 근접한 추측이다.
이날 찾아간 경희궁 터 옆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한편엔 정체모를 콘크리트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조물 위로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음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직원이 육중한 철문을 열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취재진을 맞이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다 보니 옆으로 화장실로 쓰였을 것 같은 공간이 보였다. 1층과 2층 총 면적 1378㎡ 규모로 이뤄진 방공호는 길게 뻗은 통로를 중심으로 옆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방 10여 개가 줄지어 있다.
방공호 안은 웅장한 돔 형태로 이뤄져 있다. 들어가자마자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서울역사문화박물관이 식민지 말기 당시 상황과 방공호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조명과 음향을 설치한 것이다. 천장을 바라보자 폭격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서치라이트 조명과 함께 빔 프로젝터로 3D 영상을 이용해 방공호 용도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내부 벽면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방공호 공사에 동원됐다는 학생들의 낙서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정훈 기자
내부 벽면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방공호 공사에 동원됐다는 학생들의 낙서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1층 미디어아트 전시를 해놓은 방도 눈에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3만 장의 관련 사진을 미디어아트로 만들어 놓았다. 2층엔 방공호 내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과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방공호는 지난 21일을 시작으로 오는 11월 26일까지 주말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신설동 유령역과 마찬가지로 하루 4회 회당 20명의 선착순 신청자를 받아 30분씩 관람을 진행한다.
과거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방치돼 있던 서울의 비밀공간 3곳은 이제 시민들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도시재생을 통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어렵고 잊혔지만 우리의 역사와 기억을 간직한 공간을 시민에게 개방하게 됐다”며 “특히 여의도 지하벙커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길 바란다. 경희궁 방공호나 신설동 유령역 역시 새로운 시민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실제 대피시설 활용 가능성은? 고강도 자재 사용 “폭격에도 거뜬” 이번에 서울시가 공개 결정을 내린 비밀 지하공간 3곳은 각각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공통되는 특징도 있다. ‘지하벙커’와 ‘방공호’, ‘유령역’ 모두 전시에 대피공간으로서의 활용가능성 여부다. 여의도 지하벙커 내 귀빈실에는 대통령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장실·샤워실 등과 함께 코어 조각(건축자재 일부)도 전시돼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따르면 지하벙커는 지표면에서 2.2m 아래 위치해 있으며 벙커는 천장과 바닥, 벽 모두 50cm 두께의 콘크리트로 이뤄져 있다. 또 콘크리트 단면을 잘라보았을 때 공극(입자 사이의 틈)을 찾아볼 수 없어 매우 강도 높은 재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시 벙커가 폭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치밀하고 틈 없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경희궁 방공호 외벽은 여의도 지하벙커보다 더욱 넓은 두께를 자랑한다. 돔 형태의 방공호 높이는 8.5m, 외벽의 두께는 무려 3m에 이른다. 폭격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 신설동 유령역 역시 북한 핵위협 시 대피시설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 역 관계자는 “모든 지하철역은 대피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며 “위급상황 시엔 충분히 그 역할도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과거에 그런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여의도 지하벙커 같은 경우 현재 전시문화공간으로 해놓은 상태”라며 “딱히 활용할 수 있다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다만 “민방위 훈련 때 지하철로 대피훈련 하듯 전시 때 서울시내 모든 지하공간은 대피시설로 활용된다”고 말했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