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비서 다이어리’ 모자이크 벗겨라
법원이 증거물로 채택한 ‘박연차 리스트’는 다름 아닌 박 전 회장의 비서실 여직원 이 아무개 씨가 지난 3~4년간 매일같이 박 전 회장의 전화 통화는 물론 정·관계 인사들과의 약속이나 면담 내용 등을 기록한 탁상용 달력과 노트(다이어리) 등이다. 국세청 세무조사 과정에서 압수된 여비서의 달력과 노트는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맞물려 여의도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서 확대·재생산되면서 ‘박연차 리스트’ 뇌관을 터뜨리는 핵심 역할을 했다.
검찰도 이 리스트를 바탕으로 정·관계 인사들을 겨냥한 고강도 사정 드라이브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여비서발 리스트’ 원본이 공개된 적은 없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무삭제 리스트’가 공개될 경우 정치권이 또다시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직 대통령 서거를 부른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검찰의 편파·보복 수사 논란 등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과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연 ‘무삭제 박연차 리스트’ 시한폭탄은 법정에서 폭발할 수 있을까.지난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서 박 전 회장의 여비서가 작성한 탁상용 달력과 노트는 ‘박연차 리스트’로 진화되면서 정·관계를 뒤흔드는 사정 핵뇌관으로 부상했다. 여의도 정가와 사정당국 주변에선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노트를 근거로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국세청발 리스트’를 비롯해 여의도발·서초동 검찰발·청와대발·증권가발 등 각종 리스트가 확대·재생산되기도 했다. 이들 리스트에 오른 정·관계 인사만 70여 명에 달했다. 검찰은 처음부터 ‘리스트’ 실체를 부인했지만 정·관계를 겨냥한 검찰의 고강도 사정 배경에는 바로 이 리스트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가 6월 12일 박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해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법처리한 정·관계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각종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검찰은 이날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등 그동안 ‘박연차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정·관계 인사 10명을 일괄 불구속 기소했다. 박 전 회장을 비롯해 이광재 민주당 의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이미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인사 11명을 포함하면 모두 21명이 사법처리된 셈이다.
특이한 건 사법처리된 이들 정·관계 인사 대부분이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는 점이다. 박관용·김원기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한나라당 박 진·김정권 의원, 민주당 서갑원·최철국 의원 등 6월 12일 기소된 정치권 인사들은 각종 박연차 리스트에 단골로 등장했던 사람들이다. 불구속 기소된 이택순 전 경찰청장, 김종로 부산고검 검사, 이상철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검찰의 최종 수사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은 김태호 경남도지사,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민유태 전 전주지검장 등도 리스트에 거론됐던 인사들이다. 검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법처리된 정·관계 인사들 대부분이 각종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리스트’ 실체를 둘러싼 숱한 의혹과 미스터리는 여전히 폭발력 있는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이런 와중에 ‘박연차 리스트’를 촉발한 진원지로 의심받고 있는 박 전 회장 여비서의 달력과 노트가 법정 증거물로 채택되면서 미완의 수사로 막을 내린 ‘박연차 게이트’는 새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박 전 회장이 지난 수년 동안 만났던 정·관계 인사들과의 회동 기록 등이 담겨진 여비서 노트는 검찰이 박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정황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핵심 물증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광재 의원 등 ‘박연차 리스트’에 연루된 피고인들의 재판 과정에서 여비서의 노트를 수사기록에 첨부하는 방식으로 일부 공개하긴 했지만 법정 증거물로 제출한 적은 없다. 수사기록에 첨부된 노트 내용도 박 전 회장과 해당 피고인의 약속이 적힌 부분만 적시하고, 다른 부분은 모두 지운 채 복사한 복사본만 제시해 피고인 측으로부터 ‘조작’ 의혹을 사기도 했다.
이번 재판과정에서 이광재 의원의 변호인 측은 방어권 행사를 위해 달력과 노트 원본을 보여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지만 검찰은 번번이 거절했다고 한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정·관계 유력 인사들과 박 전 회장이 만난 기록들이 유출될 경우 또 다른 정치적 오해와 파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의원의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가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 차원에서 달력과 노트를 직접 보고 작성자인 여비서에게도 작성 경위 등을 묻겠다는 피고인 측의 주장을 받아들임에 따라 ‘리스트’ 실체를 둘러싼 각종 미스터리가 해소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8월 10일로 예정된 이 의원의 공판에서 증거물이 공개되고 여비서에 대한 증인신문도 이날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검찰은 탁상용 달력은 재판부와 피고인 측이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하겠지만 노트는 이 의원과 관련된 부분만 따로 추려내 제출한다는 방침이어서 이른바 ‘무삭제 박연차 리스트’가 법정에서 공개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재판부도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는 검찰 측 입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원 등 일부 친노그룹은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몰고온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국민적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리스트’ 원본의 전면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검찰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7월 16일 기자와 만난 친노그룹의 한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 서거’보다 충격적인 정치적 파장이 무엇일지 궁금하다”며 “검찰이 증거물 공개를 꺼려하고 있는 배경에는 편파·보복 수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거나 아직 공개되지 않은 여권의 거물급을 비호하기 위한 술책이 묻어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요신문>이 확보한 ‘박연차 리스트’ 6종 세트를 분석한 결과 리스트 명단에 올라 있는 여야 정치인 중 사법처리된 인사보다 면죄부를 받은 인사들이 훨씬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여권 인사 중엔 한나라당 중진인 K H 의원과 K A S 의원, K J 전 의원 등이 리스트에 오르내렸지만 사법처리 대상이 되진 않았다. 야권 인사 중에서도 민주당 중진인 A 의원과 K 전 의원을 비롯한 전·현직 의원 10여 명이 리스트에 올랐지만 이들은 검찰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된 각종 ‘리스트’를 양산한 진원지로 지목받고 있는 여비서 다이어리에 기존에 나돌았던 리스트에는 존재하지 않은 깜짝 놀랄 거물급도 포함돼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해당 달력과 다이어리 내용이 검찰의 편파·보복 수사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자료인 동시에 제2의 사정광풍을 몰고 올 수 있는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셈이다.
법원의 증거물 채택으로 일부라도 공개가 불가피해진 여비서 다이어리가 법정에서 폭발하면서 꺼져가던 ‘박연차 게이트’ 미스터리를 해소시킬 수 있을지 정·관계의 시선이 서초동 법원으로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