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사실 무죄였지만…홍준표는 승승장구, 나는 파멸에 이르렀다”
1995년 ‘귀가시계’라고 불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모래시계> 속 ‘이종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여운환 씨의 말이다. 여 씨는 극 중 조폭세계의 비열함을 묘사하는 이종도 역할의 모델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 씨가 모래시계 방영 23년, 형이 확정된 지 24년 만에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여 씨는 당시 유죄의 유일한 증거였던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가 위헌 결정이 내려져 해당 조항이 폐지돼 재심을 청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여 씨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씌워놓은 ‘조폭 두목’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홍준표 씨가 제기한 공소사실은 전부 무죄를 받았지만 그는 모래시계 검사로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고, 나는 파멸로 빠졌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홍 대표의 반응은 싸늘하다. 홍 대표 측은 “재심청구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라며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한 상황이다.
24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 여운환 씨를 만났다. 이종현 기자
―24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 배경이 궁금하다. 특히 지난 2014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재심을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말한 바 있다. (<일요신문> 1162호 ‘모래시계’ 다시 꺼낸 여운환 4시간 격정 인터뷰 기사 참조)
“당시 판사가 인용했던 유일한 증거인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가 위헌으로 판결났다. 재심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조인들이 재심하려면 반드시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광주법원 국가기록보관소에 가봤지만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나 기록이 폐기 대상이라고 했다. 재심을 너무나 받고 싶었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인터뷰 때도 재심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출마하면서 다시 ‘모래시계 검사’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계속 모래시계 검사 이야기를 하니 답답하던 차에 한 법조인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사건이기 때문에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기록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줬다. 광주지방검찰청에 찾아가니 정말 기록이 있었다. 수레 두 대에 큰 서류 뭉치가 7~8개나 됐다. 그 기록을 변호인들이 몇 개월 동안 검토해서 재심 신청을 하게 됐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생각했다.”
―법조계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지는 확률은 1/100 정도로 평가 받는다.
“가능성은 확신을 갖는다. 변호인단이 몇 개월 동안 살펴보고 법률 검토를 해서 재심을 신청했다. 유죄를 받게 한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가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법원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법대로만 봐준다면 반드시 이번 기회에 진실이 밝혀진다고 확신한다.”
―언론에서는 이번 재심 신청을 두고 홍 대표와 진실 공방으로 보고 있다.
“재심 신청은 홍 대표를 탓하는 게 아니다. 사건 당시 홍 대표가 검사의 위치에서 기소를 할 때 공소사실은 전부 무죄를 받았다. 그걸 다시 논하지도 않을 것이고 논할 필요도 없다. 재심 쟁점은 당시 검사가 제기한 내용은 다 무죄를 받았는데, 법원이 당시에는 합헌이지만 지금은 위헌인 ‘조직폭력배 체육대회 때 체육 물품을 제공했다’는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를 인용해 조직의 자금책 및 두목의 고문급 간부라는 해괴망측한 표현을 써서 유죄를 줬다. 그 조항이 이제 위헌이니 내 죄도 유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홍 대표는 당신을 잡고 모래시계 검사로 승승장구했다. 만약 무죄를 받으면 파장이 클 수 있다.
“세상은 마치 홍 대표가 제기한 공소사실대로 유죄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그는 나를 국제PJ파 두목이라고 했지만 어떤 것도 인정받지 못해 결국 법원 판결문에 명시된 건 ‘자금책 및 두목의 고문급 간부’라는 해괴한 표현이다. 그가 제기한 공소사실도 모두 무죄를 받았다. 지금 같으면 세상이 맑아져서 10번, 100번 검사가 큰 징계를 받을 일인데 그는 모래시계 검사가 되고, 내 인생은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디서나 나를 가져다 쓴다. 그는 자신을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사는 오직 정의로운 검사로 칼로 위협당하고 자식을 두고 협박받는 것처럼 꾸몄다. 날조된 영웅담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승승장구하며 사회를 어지럽혔다.”
―홍 대표의 영웅담이 사실이 아닌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 30대 중반에 공직자였던 그는 사업가인 나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다. 55평 아파트에서 도우미를 썼다.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칼 이야기도 같은 동 아파트에 살았던 내 주치의 홍○표 선생님에게 갈 게 홍준표 대표에게 잘 못 가 아파트 경비원이 찾아온 게 전부다. 그 독일제 식칼 가격이 11만 원으로 중소기업 샐러리맨 월급 30~40% 정도 금액의 고급 선물이었다.”
―홍 대표 책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에 당신과 만난 이야기도 나온다.
“그 책을 나도 봤다. 사무실에서 나와 만난 이야기를 썼다. 책에 묘사된 내용은 그가 나에게 ‘당신을 조폭 두목으로 수사하고, 수사해서 처벌하겠다’며 ‘다만 3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당신을 선처해줄 수 있다. 1번, 광주를 떠라, 2번 언론에다 은퇴선언을 내라, 3번 조직원으로부터 칼을 맞아라’는 제안을 했는데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썼다. 검사를 오래 하지도 않은 홍 대표가 검사장이나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고 책에 직접 썼다. 내가 조직 폭력배 두목인데 은퇴 선언하고 광주를 뜨면 봐주는 게 말이 되나. 자신이 뭔데, 검사가 그런 권한까지 위임 받았나. 대통령 사면권도 그렇게 써선 안된다. 그 한 구절만 봐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권한을 남용했는지 알 수 있지 않나.”
―명예 회복에 대한 열망이 강해 보인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 응어리가 저렇게까지 쌓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흉기가 아니다. 선입견이다. 어마어마하게 나쁜 선입견을 홍 대표가 씌워놨다. 불한당 중에 불한당으로 만들었다.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나. 사람들로부터 기피대상이다. 사업적으로 정당한 비즈니스도 할 수가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 벗어보자고 해도 노력의 한계가 있다. 내가 명예회복하면 가족 앞에서 떳떳해지고 가족도 족쇄나 다름없이 받아온 사실상의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4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 여운환 씨를 만났다. 이종현 기자
“내가 스스로 위안을 받으려고, 내가 떨쳐버리기 위해서 출소하고 홍 대표를 만나 풀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그를 만나면, 그는 그 다음날 ‘내가 구속시켰던 여운환이 제 발로 찾아와서 크게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더라’고 할 사람이다. 그렇게 잘못 알려지면 가짜 모래시계 검사가 진짜 모래시계 검사로 변한다. 그게 싫어서 안 한다.”
―지금 시점에 재심 청구를 두고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내가 정치적으로 무슨 힘이 있겠나. 내가 자유한국당 반대당 정치인도 아니다. 정치적인 고려는 있을 수가 없다. 사실 홍 대표는 수백만 표를 득표한 제1야당의 대표다. 우리가 한 번 냉정하게 판단해보자. 정치적인 고려를 하면 오히려 나서지 말아야 한다. 죽은 다음에나 비교해본다는 수감생활도 겪어 봤는데 내가 그를 잘못 상대했다가 징역 갈 일 있나. 그 사람 전화 한 통이면 나 같은 사람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다. 소용돌이에 말려 험한 꼴 당하려고 자초할 것도 아니다. 내가 얻을 건 명예회복 하나밖에 없다. 모든 게 팩트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홍 대표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다.
“홍 대표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죄를 받을 일이 없다. 이게 진실이고 사실이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가 고소를 해서 진실을 가릴 생각이 있었으면 <모래시계에 갇힌 시간>이란 책이 나왔을 때 조치를 해야 했다. 책이 나왔을 때 홍 대표에게 책에 내용증명을 동봉해 보냈다. ‘사법적인 판단은 끝났지만 당신의 양심은 남아있지 않냐. 진실을 두고 공개토론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은 없었다.”
―만약 무죄를 받는다면 국가 배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 명예회복 이외에는 얻을 게 별로 없다. 보상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보상이 만약 이뤄진다면 좋은 일 하는 복지단체에 위임하고 싶다. 그런 건 전혀 관심 없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