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식칼 보냈다고? “홍준표 공개토론 하자” 도발
여운환 씨가 14일 최근 발간한 <모래시계에 갇힌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을 구속시킨 검사였던 홍준표 경남지사(왼쪽)에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진실 확인을 공개적으로 제의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일요신문>은 지난 14일 여운환 씨를 만났다. 그는 “두세 시간 이야기 했는데 ‘참 억울했겠다’ 한마디 하실 거라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겠다”고 했다. 인터뷰는 결국 4시간을 훌쩍 넘겼다.
여운환, 당시 광주 백제관광호텔 사장이 홍준표 검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91년 중반.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1년이 갓 지날 무렵이었다. 당시 홍준표 검사는 광주·전남 지역 건설업체들의 입찰 담합 비리 사건을 수사 중이었고, 사업가인 여 사장에까지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여 사장은 “광주지역에 꽤나 독특한 검사가 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그때만 해도 필생의 악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제 첫 만남은 어땠나.
“광주 인근 한 골프장이었다. 당시 나는 보안대(현 기무사령부) 장교 일행을 모시고 있었다. 홍 검사는 서방파 김태촌 후배인 백○중 등과 함께 골프를 치러 왔다. 백○중이 일행과 밥을 먹고 있는 내게 다가와 홍 검사와 인사를 시키려고 했다. 테이블을 건너다보니 안경 낀 낯선 남자가 바로 홍 검사였다. 내 연배거나 나보다 어릴 수도 있는 검사에게 구태여 인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내가 ‘다음에 하세’라고 했다.”
홍 검사의 기억은 다르다. 1996년 출간된 책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에서 그는 백○중의 인사 제안에 “검사와 깡패가 어떻게 인사를 합니까”라며 화를 내고 곧바로 돌아와 버렸다고 회상했다. 여 씨는 “깡패와 어울리느냐고 화를 냈다는데, 그는 김태촌의 직계 후배인 깡패 출신 사업가와 어울렸다”고 반박한다.
―홍 검사를 직접 만난 것은 언제인가.
“이후 홍 검사 측으로부터 ‘여 사장, 한번 만납시다’라는 제의가 왔다. 내가 흔쾌히 광주시내 호텔 일식당을 예약해 놓고 사우나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내가 만나기 싫소’라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했다. 그때는 나도 빈정이 확 상했다. 아주 불쾌했다.”
두 사람의 악연은 여 씨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홍 검사에게 칼을 보내 협박한, 이른바 식칼 협박 사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여 씨가 전한 사건의 진상은 허무하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여 사장은 11만 원 상당의 독일 유명브랜드 H 사 제품 100여 세트를 구입해 지인들에게 돌렸다. 선물 명단에는 여 사장과 친한 의사인 홍○표라는 이도 포함돼 있었다. 이것이 경비실을 통해 같은 아파트에 사는 홍 검사에게 잘못 전달됐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식칼은 어디로 갔나.
“다음날 제 운전기사가 잘못 전달됐다며 찾아왔다. 나는 홍 검사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지도 몰랐다. 우리 아파트에서 선물을 받은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그 선물이 홍 검사에게 갔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기사에게 찾아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일 홍 검사는 그걸 ‘식칼로 협박을 받았다’는 말로 둔갑시켰다. 조폭을 상대로 맞서 싸운 강직한 모래시계 검사가 됐다.”
그 무렵 홍 검사는 여운환 사장을 ‘국제PJ파’ 두목으로 지목하고 내사를 벌였다. 검찰 내 상당한 비호 세력이 있다고 여기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실제 홍 검사의 상관인 남 아무개 부장검사는 여 사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여 사장이 프랑스로 출장을 갔을 당시 전화로 ‘홍 검사가 사고를 쳤다’며 관련 소식을 알린 것도 남 부장검사였다. 소식을 들은 그는 다음날 프랑스에서 귀국했다.
―부장검사가 피의자에게 전화해 소식을 알려준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사실 프랑스 출장 이야기도 내가 직접 홍 검사에게 말한 것이다. 홍 검사는 내가 출장을 간 사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진짜 호남 최대 폭력조직의 두목이라면 출국했을 때 잡아도 됐을 텐데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귀국 직후 내가 전화를 하니 홍 검사는 ‘구속영장이 발부돼 지금 내려오면 구속된다. 주변정리를 하고 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홍 검사가 뒷수습을 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매스컴에서는 내가 폭력조직의 두목이 됐다.”
―떳떳하다면 광주로 내려와 수사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나.
“내려가면 곧바로 구속이었다. 죄가 없는데 교도소 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홍 검사와 통화한 이후부터 나는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검찰 내 엄청난 비호세력을 가진 조폭의 수괴가 됐다. 전국 수배령이 내려지고 경찰에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까지 추가됐다. 기자가 특종에 목을 매듯 경찰은 특진에 매달린다. 홍 검사가 이를 잘 알고 활용한 것이다.”
1992년 1월, 여 사장은 석 달간의 은신 끝에 체포·수감됐다. 이후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여 사장 수사의 기폭제가 된 것은 당시 국제PJ파 두목으로 이미 구속 수감 중이던 김○용의 탄원서였다. 김 씨는 탄원서를 통해 자신은 부두목이며, 실제 두목은 여운환을 포함해 4명이라고 알렸다. 재판 과정에서 탄원서를 놓고 진실 공방이 오갔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여운환 씨가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모습. 왼쪽은 이용호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김○용의 탄원서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조폭 두목이 4명이라고 밝힌 것도 말이 안 되고, 그중 1명은 김○용이 열한 살일 때 광주를 떠나 마주칠 일조차 없는 사람으로, 검찰이 조직생활을 했다고 밝힌 때 그는 외항선원 생활을 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검찰과 법원은 이 탄원서를 사실로 받아들었다. 이후 김○용이 5년형에서 3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여 사장은 자신을 국제PJ파 자금책이라고 언급한 부분도 전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가 건넨 1심 판결문에 따르면 검찰은 ‘1982년 결성된 국제PJ파는 1986년경 조직을 정비, 광주 동구 충장로 1, 2가와 무등극장 주변을 상대로 활동’했으며 ‘여 씨를 비롯한 피고인은 호텔 오락실과 나이트클럽 등의 활동을 보호받는 대가로 자금지원’을 했다고 기술했다.
―조직의 자금책이라는 부분도 부정하나.
“기본 사실조차 다르다. 판결문에 언급된 호텔 오락실은 1991년도에 개업했다. 국제PJ파 활동 반경과 5㎞나 떨어져 있다. 자금지원이라는 부분도 언제, 어떤 명목으로, 얼마를 건넸다는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제시하지 못했다. 검찰은 나를 범죄조직의 수괴라고 기소했지만 법원은 동일성이 인정된다며 ‘자금책 및 고문급 간부’로 판결했다.”
―당시 재판 과정이 전부 잘못됐다는 얘기인가.
“검찰은 증거를 갖고 기소를 하고 법원은 그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서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저는 모든 이야기를 증거를 토대로 하고, 사실과 다르다면 처벌도 받을 것이다. 홍 검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사회가 나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책을 출간한 뒤 홍준표 지사에게도 보냈다고 들었다.
“홍 검사도 과거 저와 관련된 책을 썼고, 저 역시 늦게나마 책을 쓰게 되었으니 어느 쪽이 진실과 양심에 가까운지 가려보자는 것이다. 100 분의 1이라도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앞으로 제가 받아야 할 일에 두려움이 왜 없겠나. 지금 이 나이에 객기부릴 일도 없고, 가족들의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다.”
―홍준표 지사를 상대로 개인적 복수를 하겠다는 것으로도 보인다.
“복수라면 이렇게 느긋하지는 않을 것이다. 승승장구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한낱 깡패 조무래기가, 미친놈 아니냐고 할 것이다. 현재 그분은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 측근이라도 조용히 놔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 간첩 사건, 용공 사건들이 세월이 지나 고문에 의한 조작, 증거조작 등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나. 제 사건 역시 ‘깡패 조작 사건’일 뿐이다.
―재심 신청까지 할 것인가.
“재심에 대한 생각이 아직 없다. 구차하니까 안하려고 한다. 재심이라는 것이 한두 번 법원에 출석하는 일이 아니기에 지금도 사업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긴 시간을 쏟을 수도 없다. 제 사건을 보는 법조계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공개토론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겠나.
“지금이라도 홍준표 씨가 공개적으로 사과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을 접겠다. 제 아내가 너무너무 걱정을 한다. 검찰에게 굽히지 않았다는 괘씸죄로 그런 일까지 당했는데 무지막지한 권력에 안 굽혀서 또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연좌제 고통을 받아야 하겠냐는 것이다. 저도 제 가족을 편하게 해 주고 싶고, 오히려 내가 (용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여론은 당신 편이 아니다.
“여론은 시간이 지나면 성숙되리라고 본다. 우선은 홍 검사와 저와의 일에 대해 진실을 가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홍 검사 무용담의 첫 순서는 항상 나다. 지금까지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사업도 하고 있는데, 경쟁을 할 수도, 입찰을 할 수도 없다. 나와 거래를 하려고 하면 조사가 들어오고 내사가 들어온다. 다들 저와의 거래를 두려워한다.”
―최근 사찰을 당했다는 보도도 있다.
“18일 인권위에 제소를 하려고 한다. 20년 이상을 당해 왔다. 경찰서 안에 저를 담당하는 직원이 정해져 있고 주거지에 가까운 치안센터에서 동향을 보고하게 돼 있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아파트 경비실까지 와서 동향을 묻고 하니 당연히 주변에서 알 수밖에 없다. 저를 차치하고라도 제 가족들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 지금이라도 제 억울함을 설명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겠다 싶었다.”
여 씨는 홍준표 검사와의 악연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무대 위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라며 “저는 그런 주제가 못되는 일반인이자 사업가”라고 밝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홍 검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버지를 보고 검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고 성공한 검사가 됐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운환은 스물두 살 때 폭행을 당한 후배의 빚을 갚겠다며 회칼을 휘둘려 붙잡혀 명망 있는 아버지가 젊은 검사와 경찰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목격하고 건달 생활을 접었다. 비슷한 동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은 악연을 끊을 수 있을까.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