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라인이 자료 모아…호남 기반 대기업 내사 DJ와 연관성 규명하려다 노무현 서거로 접은 듯
고 김대중 대통령(DJ) 비자금 의혹 제보 논란에 휩싸인 박주원 국민의당 전 최고위원이 15일 오전 국회에서 의혹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2008년 10월 20일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장. 질의자로 나선 주성영 전 의원은 당시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DJ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주 전 의원은 100억 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 사본을 보여주며 DJ 비자금 수사를 촉구했다. 그는 이 자료를 2006년 2월 전직 검찰 관계자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주 전 의원은 다음 날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6조 원대의 은행 비자금이 이희호 여사 쪽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DJ 측은 주 전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수사 착수 2년여 만인 2010년 8월 주 전 의원에 대해 벌금 300만 원 약식기소 처분을 내렸다. 6조 원대 비자금 의혹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혐의로 결론지었다. 이를 두고 당시 DJ 측에선 “MB 정권 검찰이 수사를 일부러 지지부진하게 진행했다” “적극적으로 혐의를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등과 같은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12월 8일 ‘판도라 상자’가 다시 열렸다. 주 전 의원에게 CD를 건넨 ‘전직 검찰 관계자’가 박주원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라는 <경향신문> 보도가 나오면서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검찰 ‘정보통’ 수사관 출신인 박 전 최고위원은 2006년 안산시장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성했다. 그 후 19대 총선(무소속)과 20대 총선(국민의당)에서 연이어 낙선했던 박 전 최고위원은 지난 8월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박 전 최고위원은 안철수 대표 라인으로 분류된다. 보도 이후 안 대표에게로 불똥이 튄 것도 이 때문이다.
주성영-박주원 간 진실 공방과는 별개로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 초반 이른바 ‘DJ 죽이기’를 위한 정권 차원의 작업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2006년 받은 제보 내용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폭로한 것은 누군가가 주 전 의원에게 확신을 부여한 것”이라며 “2008년 10월은 MB 정권이 박연차 수사로 혈안이 돼 있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나도 너무 난다”면서 이 부분에 대한 검찰 수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우선 시계를 2008년 10월로 되돌려보자. 당시 정권 분위기에 대해 한 친이계 핵심 전직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거칠게 말하면 눈이 돌아가 있을 때였다.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첫해를 광우병 집회 대응하다가 다 보냈다. 잃어버린 일 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다. 우리는 광우병 집회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봤다. 지난 정권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대적인 사정 드라이브를 걸었던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다.”
실제 국세청은 ‘박연차 게이트’ 시발점이 된 태광실업에 대해 세무조사를 벌였고, 사정기관들은 앞을 다퉈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노 인사 주변을 샅샅이 캐고 다녔다. 그런데 DJ를 겨냥해서도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MB 정권이 진보 정권 두 전직 대통령을 모두 겨누고 있었던 셈이다. 주 전 의원이 느닷없이 DJ 비자금을 꺼내든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주 전 의원이 공개한 100억 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를 비롯한 DJ와 관련된 여러 첩보들이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공유됐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고위 인사는 “주 전 의원이 폭로한 것은 그리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 정권 때 생산된 것이다. 왜 하필 MB 정권 초에 DJ 비자금 파일이 세상에 나온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정권에서 필요로 했을 것이고, 아마 검찰에서도 이를 활용할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분명 주 전 의원에게 누군가가 시그널을 줬을 것이다. 주 전 의원이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릴 문제가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MB 정권 민정실에서 근무했던 사정당국 관계자도 “(주 전 의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폭로다. 주 전 의원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을 뿐이다. DJ 쪽과 관련된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던 때였다.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것도 있었지만 우리도 자체적으로 DJ 자료를 만들어 VIP(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권 성골이라고 할 수 있는 ‘영포라인’ 핵심 실세들이 이를 전담했는데, 공식 업무라기보다는 비선 라인이 가동됐다”고 말했다. MB 정권 사정당국 복수의 관계자들은 청와대 하명에 따라 DJ를 잡기 위한 상당한 양의 자료를 모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무렵 호남에 기반을 둔 한 대기업에 대해서는 국세청 세무조사와 검찰 내사가 동시에 이뤄졌는데, 역시 DJ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앞두고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실시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일요신문>이 그때 검찰이 작성한 대기업 파일을 입수해 확인해본 결과 500여 쪽 분량의 페이퍼엔 총수 일가 가계도와 자산 현황, 재무제표 분석, 비리 의혹 등이 담겨 있었다. 보고서 작성에 관여했던 검찰 관계자는 “사실상 그 대기업을 표적으로 하고 있었다”면서 “이 대기업과 DJ 쪽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부분을 규명하는 게 수사의 큰 그림이었다”고 전했다.
친이계 인사들 역시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몇몇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 타깃은 DJ가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까지 했다. 한 친이계 의원은 “DJ와 관련된 돈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해외 정보기관에까지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친이계 핵심 전직 의원도 “주성영 폭로엔 MB 정권 기류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궁지에 몰렸던 MB 정권에서 전 정권, 특히 DJ 비자금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